ADVERTISEMENT

<4부,34회국민.주택은행 합병>: 구조조정 부진하자 "우량銀끼리라도 합쳐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4면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은 오늘 합병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내년 6월까지 합병작업을 마무리하기로 했습니다."

2000년 12월 22일 오후 5시, 한국은행 기자실.김상훈 당시 국민은행장(현 국민은행 이사회 회장)과 김정태 당시 주택은행장(현 통합 국민은행장)이 전격 합병을 발표했다. 자산 기준 국내 랭킹 1·2위 은행간의 이날 합병 발표는 은행, 아니 금융계의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대사건이었다. 그러나 발표 후 악수를 나누며 취재진을 향해 포즈를 취한 두 은행장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익명을 요구한 당시 주택은행 관계자의 회고.

"합병 발표 날 이미 노조가 알고 아침부터 연대 파업에 들어갔다. 일단 합의는 했지만 변수가 너무 많아 합병 성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같은 시각, 두 은행 노조는 합병 결사 저지를 외치며 일산 외곽 국민은행 연수원에서 파업을 벌였다.그러나 합병은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넌 뒤였다. 노조는 결국 7일만에 직장으로 복귀한다.

합병의 가장 큰 걸림돌로 보였던 노조문제가 일단 수면 아래로 잠복했지만 막상 두 은행의 합병은 은행장 선임 등을 놓고 진통을 겪은 끝에 10개월여 뒤인 2001년 10월에야 매듭지어진다.

총자산 1백80조원, 세계 68위. 국내 은행 중 처음으로 세계 1백대 은행에 발을 들여놓은 초대형 은행의 탄생은 우연을 씨줄로,필연을 날줄 삼아 엮어낸 드라마였다.

최범수 당시 금융감독위원회 자문관(현 국민은행 부행장)의 회고.

"2000년 총선 후 금융계의 최대 화제는 합병이었다. 2년 전인 98년 부실은행 퇴출 등 1차 구조조정으로 형편이 나아지던 은행들이 99년 대우사태를 겪으면서 다시 삐걱거렸다. 이 바람에 은행의 장기생존 구도를 새롭게 짜야 했는데 그게 합병이었다. 당시 모든 은행간 조합을 연구했는데 그 중 하나가 국민+주택이었다."

그러나 정부가 검토한 수많은 합병 구도 중 국민+주택은 단지 서류상 가능한 조합 정도였을 뿐이었다.

이용근 당시 금융감독위원장(현 안진회계법인 고문)의 회고.

"국민과 주택은 모두 소매금융에 치중해 있어 진작부터 시너지 효과가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국민과 주택을 합해놓으면 소매금융을 절반 넘게 차지한다. 거대 은행이 소매금융을 독식해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금감위의 판단이었다."

당시 정부는 국민+주택의 조합보다는 두 우량은행이 상대적으로 부실한 조흥·외환 등과 합병하는 구도를 바라고 있었다. 그 해 3월 정부가 당시 금융감독원 부원장이던 김상훈을 노조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공석 중이던 국민은행장에 밀어붙인 데는 그같은 복안이 담겨있기도 했다.

다시 이용근의 회고.

"당시는 은행권 전체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게 중요했다. 공적자금 투입 은행과 우량은행의 합병이 그런 면에서 바람직했다. 정부가 부실채권을 인수하고 증자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이런 합병을 유도한다는 계획도 있었다. 정부 내에 국민과 주택이 각각 조흥과 외환은행을 하나씩 맡아 처리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고, 이게 이심전심 김상훈 국민은행장에게도 전달됐을 것이다."

김상훈은 취임 직후인 2000년 5월 기자들과 만나 은행장 중 처음으로 합병 가능성을 공식 언급한다. 그러나 김상훈이 지목한 합병 파트너는 조흥이나 외환은행 등이 아니었다.

"국제 수준의 선도은행이 나오려면 우량은행 간 합병이 불가피하다."

그러자 당시 우량은행으로 꼽히던 신한·하나·한미·주택은행 등과의 각종 합병설이 쏟아졌다.

김상훈의 회고.

"3월 행장 취임 직후부터 모든 합병안을 검토했다. 공적자금 투입 은행과의 합병은 직원들은 물론 외국인 대주주들이 앞장서 반대했다. 그런 소문만 나면 주가가 곤두박질했다."

설만 무성하던 2차 은행 합병에 하나의 실마리를 열어준 것이 석달 뒤에 단행된 8월 7일 개각이었다.

당시는 99년 대우사태에 이은 현대그룹 위기로 시장불안이 커져가고 있던 때였다.

진념 부총리, 이근영 금감위원장의 새 경제팀은 11월 3일 기업 퇴출과 11월 8일 은행 경영평가 등 대대적인 2차 금융·기업 구조조정을 실시했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랭했다.

익명을 요구한 당시 청와대 관계자의 회고.

"경제 위기설에 시달리던 DJ도 국면 전환을 바라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구조조정의 가시적 성과가 필요했고, 그 중 가장 알기 쉬운 것이 은행 합병이었다."

진념·이근영은 9월 이후 "우량은행 간 합병이 곧 가시화할 것"이라며 연일 은행 합병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우량+공적자금 은행 간 합병을 추진했던 이전 경제팀과 달리 새 경제팀은 우량+우량 간 합병에 주력했다.

익명을 요구한 당시 금감위 고위 관계자의 회고.

"부실+우량보다 우량+우량 조합이 성사 가능성이 컸다. 거의 매일 우량은행 간 합병을 독려했지만 은행들이 좀처럼 정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주택·국민 등 선도 은행장들에게 특히 많은 얘기가 건네졌다."

11월이 되자 정부는 부쩍 국민·주택은행을 조였다. 정부의 압박에 몰리던 김상훈이 김정태를 만난 것은 11월 14일 SBS 창사 기념 행사가 열린 힐튼 호텔 만찬장에서였다.

김상훈:다른 은행장들과 합병 의사 타진을 수없이 해봤지만 다들 피합니다. 합병만 생각하면 밤에 잠을 못 잘 지경입니다.

김정태: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택은행과는 다들 합병을 안하겠답니다.

김상훈:차라리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이 합병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김정태:정말로 합병에 뜻이 있는 겁니까? 상황에 몰린다고 무리하지 말고, 남들 얘기는 무시하십시오.

김상훈:정말로 해봅시다.

김정태:그렇다면 해보지요.

이날 이후 국민+주택은행 합병은 급물살을 타게 됐지만 막상 협상은 난항을 거듭했다.

익명을 요구한 주택은행 고위 관계자의 회고.

"국민은행 협상 실무자는 처음에 안경상 상무에서 김덕현·김유한 상무로 며칠새 휙휙 바뀌었다. 협상 테이블에 앉아 합병을 하지 말자는 주장도 강하게 했다. 합병할 준비가 안돼 있었다."

두 은행의 합병 논의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12월 12일, 국민은행 노조는 은행장실을 봉쇄하고 신나를 뿌려가며 이틀간 실력행사에 나선 끝에 14일 새벽 김상훈 행장의 협상 중단 발표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후 국민·주택은행은 일주일여의 극비 협상을 열고 12월 22일 전술한 대로 전격 합병을 발표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날의 합병 선언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김정태의 회고.

"합병 발표가 있던 22일 우리 측은 합병 후 은행의 이사회 의장과 은행장란을 공란으로 비운 서류를 만들어 들고 갔다. 행장 문제까지 이날 함께 매듭지어야 훗날 잡음이 없겠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합병 비율·존속법인 문제 등을 따지면서 이런 논의를 할 겨를이 없어 준비했던 서류를 꺼내지도 못했다."

최대 위기는 2001년 4월에 왔다. 두 은행은 김병주 서강대 교수를 위원장으로 하는 6인의 국민·주택은행 합병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세부사항을 논의해왔는데 정식 합병 계약 체결을 앞두고 김정태가 합추위 안을 거부한 것이었다.

김병주의 회고.

"쟁점은 ▶합병비율▶존속법인▶은행장▶은행명 등 크게 네가지였다. 양해각서가 있긴 했지만 두 은행 해석이 사사건건 달랐다. 합병비율은 주택 1대 국민 1.6 정도, 합병 때 주체가 되는 존속법인은 국민은행으로 하고 은행명은 주택이 정하도록 했다. 3월 28일 주택 쪽의 김영일 당시 부행장이 서명까지 했다. 그런데 갑자기 김정태 행장이 이를 못받겠다고 버텼다."

급기야 이근영이 중재에 나섰다. 4월 9일 이근영은 김정태·김상훈과 3자 회동을 가졌지만 소득없이 헤어졌다.

11일 오전 4시 역삼동 라마다 르네상스호텔 21층. 이근영은 답답한 듯 연신 물을 들이켰다. 전날 오후 6시30분부터 10시간 넘게 배석자 없이 마라톤 협상을 벌였지만 두 행장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출근시간도 다 됐고, 이제 더 이상은 안되겠으니, 두 분이 알아서 하십시오."

이근영이 볼멘소리를 던지고는 먼저 자리를 떴다.

이근영의 회고.

"거의 포기하고 있는데 오후 4시쯤 김정태 행장이 전화를 했다. 마지막 카드를 갖고 김상훈 행장을 만나겠다는 거였다. 한시간쯤 지나 이번엔 김상훈 행장이 전화를 해 '위원장님, 합의봤습니다'고 했다."

두 행장은 이근영의 중재안대로 존속법인은 국민·주택이 아닌 별도의 신설법인을 만들어 통합하기로 했다. 대신 법적인 문제가 생기면 금감위 등 정부가 책임을 져주기로 했다. 대부분 김정태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다시 최범수의 회고.

"당시 두 은행장은 존속법인 은행장이 합병 후 통합은행장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해 존속법인이 어디냐를 놓고 다툼이 심했다. 존속법인 이사회가 행장을 뽑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통합은행장 선임이었다. 이를 두고 두 행장의 출신지인 전남·전북을 빗대 '남북 전쟁'이란 얘기까지 나돌았다. 이근영은 다음날인 12일 청와대 업무보고에서 정부 불개입을 DJ에게 건의했다.

"국민·주택 합병 은행장 선출에 정부는 일절 간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세요. 하지만 큰 은행을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할 것입니다."

"외국의 경우 우량은행끼리 합병할 때 한쪽이 행장이 되면 한쪽이 이사회 회장을 맡습니다. 국민·주택도 그런 식으로 교통정리를 하겠습니다."

"그거 참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합병은행장 선정 작업은 7월 25일 오후 2시 선정위원 6명의 휴대전화가 꺼지면서 시작됐다. 하얏트호텔 프레지던트 스위트룸. 김병주 선정위원장·최범수 합추위 간사·김지홍 당시 국민은행 사외이사·최운열 당시 주택은행 사외이사·돈 메킨지 ING측 대표·민지홍 골드먼 삭스측 대표 등은 20시간 가까이 난상토론을 벌였다. 첫 표결 결과는 3대2. 1명이 기권하고 3명이 김정태를 지지했다. 기권한 김병주는 대주주 간의 합의를 밀어붙였다.

"골드먼 삭스와 ING가 (한쪽으로)합의하지 않으면 절대 통합 은행장을 선출할 수 없습니다. 1대주주의 축복을 못 받는 은행장이 어디 있습니까. 양쪽이 합의해 결정하십시오."

ING와 골드먼 삭스 측은 본국과 핫라인을 열어놓고 숙의를 거듭했다. 다음날 새벽 골드먼 삭스 측이 김정태로 돌아서면서 마침내 4대1로 결론이 났다. 기권했던 김병주가 가세하면서 5대1. 7개월여를 끌어왔던 합병이 마침내 최대 고비를 넘어서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3개월 뒤인 11월 1일 정식 출범한 통합 국민은행은 소매금융 시장의 30%를 지배하는 절대 강자가 됐다. 이렇게 해서 우량은행간 연쇄 합병을 유도해 금융 강국의 틀을 짠다던 당초 구상을 숙제로 남겨둔 채 2차 금융구조조정도 막을 내린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