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 권리 막는 공공의 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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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호 30면

올 5월 A씨가 사용하던 휴대전화기에서 불이 났다. 삼성전자의 매직홀 기종이었다. 삼성은 “문제를 공개하지 말라”며 A씨에게 500만원을 줬다. 한 달 후 삼성 측은 A씨를 다시 찾았다. 정부공인기관인 한국산업기술시험원에 맡겨 분석해 봤더니 제품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외부 원인으로 불이 났다는 결과를 얻었다는 것이다. 삼성은 A씨에게 “단말기에 문제가 없다”는 합의서에 서명을 요구했다. A씨가 이에 반발해 언론에 공개하면서 논란이 벌어졌다.

김창우 칼럼

7월 말에는 B씨의 아이폰3GS가 충전 중 불이 났다. KT 고객센터에서는 “단말기 외관에 변형이 생겼다”며 29만원의 수리비를 요구했다. 외관에 흠이 난 것은 소비자의 과실에 해당되기 때문에 무상 서비스를 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며칠 뒤 KT는 B씨를 다시 찾았다. ‘탈옥(jail break·다양한 부가기능을 쓸 수 있도록 순정 OS를 해킹하는 것)’한 것이 확인돼 수리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애플에는 탈옥한 아이폰은 서비스를 해주지 않는다는 약관이 있다.

불이 났다는 사실은 같지만 삼성과 KT의 대응 방식은 달랐다. 소비자의 반응도 엇갈린다. 삼성은 ‘소비자를 매수하려는 악덕기업’으로 비난을 받고 있다. 반면 KT는 “B씨가 약관을 위반한 만큼 당연한 대응”이라는 의견이 많다. 물론 “탈옥 여부와 충전 중 불이 난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다”는 의견도 있지만 소수다. 애초 ‘외관에 상처가 났으니 무상 서비스가 안 된다’는 규정 자체가 잘못됐다는 지적도 있다. 논란이 커지자 KT는 개선책을 마련하겠다고 나섰다.

삼성과 KT의 대응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어찌됐건 큰 보상을 받았으니 삼성 방식이 좋다는 사람도 있고, 원칙대로인 KT의 대응 방식이 맞다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은 있다. 소비자로선 항의도 할 수 있고, 맘에 안 들면 다른 회사 제품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런 선택이 반복되다 보면 아이폰이든 삼성이든 더 소비자 친화적인 제품이 살아남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선택권이 없으면 어찌될까. 소비자로선 항변 한마디 못하고 끌려다니기 쉽다. 불편과 고비용을 일방적으로 감내해야 할 수도 있다. 문제는 실제 그런 일이 주변에서 쉽게 일어난다는 점이다. 주로 정부가 관계되면 그렇다. 액티브X와 통신요금 인하가 좋은 예다.

2주 전 우리은행이 액티브X를 쓰지 않는 오픈뱅킹 서비스를 시작했다는 인터뷰 기사를 썼다. 다음 날 은행 담당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금융 당국에서 “왜 이런 기사가 나갔는지 해명하라”고 닦달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금융 거래를 하려면 ‘보안 4종 세트’를 깔아야 한다’ ‘액티브X를 쓰지 않는 보안시스템을 도입하기 위해 정부 당국을 설득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는 내용을 문제로 삼았다고 한다. 기존 방식이 국제 표준과 맞지 않고 여러 문제가 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얘기다. 그 바람에 소비자들은 꼭 필요하지도 않은 프로그램을 까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금융위원회와 행정안전부는 온라인 뱅킹과 쇼핑을 편리하게 쓰려는 소비자의 권리를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현행 규정은 1990년대 말 정보통신부에서 보안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도입 당시에는 필요성이 있었지만 기술 발전으로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하지만 낡은 규정을 앞세워 은행·카드사를 좌지우지하는 데 익숙해진 금융 당국은 도무지 변할 줄 모른다. 오픈웹 운동을 주도하는 김기창 고려대 법대 교수는 “방송통신위원회가 뒤늦게 공인인증서 강제 규정을 폐지하려고 나서자 금융위·금감원이 가로막고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고 방통위를 ‘친소비자적’으로 보기도 어렵다. 싼 통신요금제를 불공정하다며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SK텔레콤은 지난달 (자기들 주장에 따르면) 원가에 못 미칠 정도로 싼 요금제를 내놓았다. 하지만 아직 방통위에 인가 신청을 못하고 있다. 경쟁업체인 KT가 ‘불공정 경쟁’이라며 반발하자 방통위가 인가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로선 요금이 싸지고 혜택이 많아지는 게 좋다. 게다가 ‘통신요금을 20% 내리겠다’는 것은 이명박 대통령의 핵심 공약 가운데 하나다. SK텔레콤은 2일 인가 신청을 강행할 예정이다. 방통위에서 어떻게 대응하는지 눈여겨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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