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성, 그 단순한 아름다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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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미술사학자 에른스트 곰브리치가 지난해 타계하기 몇 개월 전에 탈고한 원고가 『원시성 선호』 (The Preference for the Primitive·파이돈 출판사)라는 제목으로 최근 미국과 영국에서 나왔다. 현지 전문가들은 이번 유작이 곰브리치의 박학다식함에 대한 총결산의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주목하고 있다.

'서구의 취향과 미술의 역사에 나타난 에피소드들'이라는 부제에서 드러나듯이 서양 미술에 원시성(源始性), 즉 케케묵고 거칠고 치기(稚氣) 어린 것들을 동경하는 경향이 주기적으로 일어난 배경을 분석하고 있다. 당연히 고갱과 피카소 이후 서양 화단을 지배하게 된 프리미티비즘(원시주의)에 대한 분석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플라톤이 선호한 것들, 장엄한 이름다움의 지배 등 7개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을 서양 평단에서는 곰브리치가 50여년 천착해온 연구의 결정판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원고를 집필할 당시 곰브리치의 정서는 "인류의 미술은 라스코 벽화 이후로 줄곧 퇴폐적으로 흘러왔다"던 후안 미로의 심정과 비슷했을 듯하다.

20세기 서양 미술의 흐름을 확 바꿔놓은 것은 1907년 파리의 트로카데로 박물관에서 열린 아프리카·오세아니아 그림전이었다. 파블로 피카소는 원시성에 눈을 뜨게 된 충격을 이렇게 전했다. "뭔가 나의 내면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금방이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듯한 전시장에서 온갖 모양의 가면과 먼지로 뒤덮인 빨간색 인형을 보면서 말이다.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아마 그날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정규 교육을 통해 라파엘의 화풍을 완벽하게 소화했던 피카소는 그 날 이후로 그런 제도권 교육에서 배운 것을 털어내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고 털어놓았다. 피카소 이후로 미술사를 장식한 화가들은 광기와 치기 어린 그림과 만화와 낙서같은 그림을 많이 그렸다. 20세기 초반 영국의 화가 로저 프라이는 "그레코-로망 미술의 좁은 세계는 프리미티비즘의 발견으로 일순간에 날아가버렸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이 시대는 고풍스런 고전미술의 힘과 단순함이 바로크와 로코코 미술의 고상함보다 더 높이 평가받았다. 원시성은 자연에 더 가까운 것으로, 그래서 미적으로도 한 차원 더 높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곰브리치는 그런 경향의 뿌리를 멀리 그리스 사상에서 찾으려고 노력했다. 때문에 이 책에는 플라톤과 키케로·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나무처럼, 비극 같은 예술적 형태도 절정을 향해 성숙하다가 정점을 넘어서면 다시 시들어가다 마침내는 죽고 만다"는 주장을 폈다. 곰브리치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정명진 기자

myungjin@joongang.co.kr

◇곰브리치는=1950년대 이후 서양 미술의 이론 분야를 이끌어온 인물이다. 특히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그림에 대한 해석이 탁월했다. 92세까지 장수하면서 미술과 인접 학문에 관한 이론서를 무려 50여권이나 남겼다. 『서양미술사』 『상징적 이미지들』 『문화사 탐구』 『역사와 사회학』 『그림과 환상』 등이 대표작이다. 이중 국내에도 번역된 『서양미술사』 는 고전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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