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9단'의 개방게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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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을 '정치 9단'으로 부른다면 북한의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은 '외교 9단'으로 부를 만하다. 이때 '9단'은 곧 진정한 고수(高手)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치 9단들이 잇따라 대통령을 지낸 한국의 정치가 아직도 저질(低質) 딱지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이를 웅변한다.

북한의 외교능력은 보통이 넘는다. '한국보다 몇 수 위'라는 듣기 거북한 바깥의 평가도 없지 않다. 벼랑끝 줄타기를 일삼으며 실리(實利)를 챙기는 외교 책략에 그만큼 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잔재주만으로 진정한 고수는 되기 어렵다. 중국의 덩샤오핑은 "가난은 사회주의가 아니다"고 단언했다. 인민들의 가난을 해결 못한 사회주의 국가의 외교가 제 아무리 능수능란한들 어떻게 고단수 평가를 받겠는가.

그런 북한 외교가 이번에는 홍콩같은 특별 행정구식 개방 전략으로 바깥 세계에 대담한 승부수를 띄웠다. 빈곤의 수렁에서 진정 탈출을 위한 것인지, 또 한탕의 생존 자금을 챙기기 위한 책략인지는 평가가 엇갈린다. 하지만 이번 신의주 특구는 단순한 경제특구를 넘어 동북아 및 이 지역 이해관계를 아우르는 큰그림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에서 예사롭지가 않다.

중국의 개방 전략은 점(點:단위 특구)에서 선(線:연해 개방 도시들을 연결), 그리고 면(面:개방 지역)으로 단계를 밟아왔다. 이번 북한의 전략은 세 가지 점에서 중국의 특구 모델과 구분된다.

첫째, 특구식 개방과 물류 거점 전략 및 국가경제개혁 전략을 '원샷 패키지'(동시적 한 묶음)로 묶었다. 양빈(楊斌)이 어떤 사람인지, 신의주를 돈 몇 푼 받고 팔아넘기는지의 여부가 당면 관심사다. 그러나 김정일의 이번 개방 게임은 그 같은 미세한 접근보다는 거시적·입체적 맥락에서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둘째, 김정일은 이 개방 게임에 동북아의 이해(利害) 당사국들을 교묘히 끌어들였다. 한국과 중국·러시아와 일본에 대해 점-선-면의 동시·다발 전략을 펼치면서 미국을 간접적으로 압박한다. 이는 미국의 대북 특사 파견을 이끌어냈다.

셋째, 이번 개방 게임은 현 북한 체제가 살아남기 위한 생존 차원의 게임이다. 그럼에도 김정일은 시류나 외부 압력에 떼밀려 개방하는 모양새가 아니고 스스로 엄청난 결단을 주도한 듯 '개방 공세(攻勢)'를 취했다.

단둥(丹東)-신의주 모델이 홍콩-선전(深 ) 모델처럼 북한 사회 변화의 진열창이 되고 자본 금융 마케팅 기법의 도입 창구가 될 수 있을지는 의문 투성이다. 경공업 하청 및 물류 기지가 고작이고 북한 체제의 붕괴만 촉진시킬 수도 있다. 김정일은 이해 당사국들과의 '공존 게임'으로 위험 부담 해소를 노리고 있다. 한국-일본과 중국-러시아를 잇는 물류 기지는 동북아와 유럽을 육로로 연결하는 우리의 '철의 실크로드' 꿈과도 직결된다. 윈-윈게임도 불가능하지는 않으며 한반도 정세는 이미 새로운 전개를 맞고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대응 전략이다. 민주국가 외교의 본질은 공개 외교(Public Diplomacy)다. 결정 과정에서 공론화를 거치고 반대 및 비판 때문에 전략이 수정되고 이 과정에서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 때문에 민주국가에 김정일식 '외교 고수'는 드물지만 이는 민주 외교의 장점이기도 하다.

대북 비밀 지원 내역은 그것대로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 그러나 이들 의혹 때문에 '퍼주기 노이로제'에 걸려 대북 관계에 거시적·체계적 대응을 기피하거나 소홀히 한다면 이야말로 나무는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격이다. 어느 대선 후보에게서도 이렇다할 게임 전략이 보이지 않으니 딱하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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