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살기 바쁜데 문화는 웬 문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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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비디오예술가 백남준이 캔버스 대신 TV를 선택했다면, 화가 잭슨 폴록은 깡통을 잡았다. 깡통 구멍에서 질질 새는 물감을 무작위로 흘리는 파천황(破天荒)의 작품행위를 했지만, 알고보면 그건 서양지성사적 의미의 사건이었다. 의붓자식 취급을 받아온 감성·무의식을 전진배치시킨 쿠데타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따로있다. 그 추상표현주의의 폴록과 함께 뉴욕이 파리를 밀어내고 현대미술 1번지로 등극했다는 점이다.

2차대전 직후 시작한 미국의 영광을 완결시킨 화가는 1960년대 팝 아트의 수퍼스타 앤디 워홀이다. 마릴린 먼로 사진, 포르노잡지 등 대중문화를 미술에 대거 끌어들인 것이다. 워홀은 이렇게 자신만만하다. "재능을 팔 수 있는 미국이란 나라는 멋지다. 재능있는 이는 하룻밤 새 부자가 될 수 있으니…." 카터 래트클리프의 책『앤디 워홀』(눈빛, 1995)에 비치는 그 발언은 미국의 숨은 힘을 보여준다.

하긴 폴록의 등장 과정에 CIA 배후설이 제기될 만큼 미국은 문화의 힘을 알아도 제대로 알았다. 개미군단도 한몫을 했다. 폴록·워홀의 그림을 한두점 콜렉션해두지 않으면 진짜 뉴요커 축에 낄 수 없다는 분위기 말이다. 미술 수요계층은 거기서 형성됐다. 한국은 어떨까. 마침 워홀과 전혀 다른 목소리,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들렸다. 임옥상이 그이다.

"배울 만큼 배웠다는 사람들조차 그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림은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인 정도가 아니다. 모르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게 우리 사회다.…그들에게 예술은 고작 아름다운 것, 아니 아름답지 않아도 아름답게 분칠하는 것 정도다."(14일자 본지 '삶과 문화') 그의 말대로 문화와 담 쌓고 사는 한국사회의 살풍경은 통계치로 입증된다.

최병식이 펴낸 책『미술시장과 경영』(동문선,2001)에 따르면 국내 미술애호가층은 1천5백55명 정도다. 애호가란 한해에 작품 수점을 사는데 몇백만원을 쓰는 사람으로 한정했다. 3천만원 내외를 투자해 한해 10점 내외를 구입하는 핵심콜렉터(기업 포함)는 불과 52곳에 불과하다. 세상에나! 미협과 전국민족미술연합에 가입한 작가는 1만5천여명이라고 한다. 이런 가분수 구조가 따로 없다. 근대적 미술시장이 현대화랑·명동화랑이 생겨난 70년대에 비로소 형성됐다니 미술동네는 그렇다 치자.

음악 연극 무용 장르는 어떨까? 사정은 어슷비슷하다. 음악시장이라야 정기적으로 음악회장에 가는 '콘서트 고어'는 1만명을 크게 넘지 않는다. 무용은 더 하다. 마켓이란 말 자체를 쓰기 쑥스럽다. 연극 역시 안정적인 수요계층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뮤지컬을 중심으로 젊었을 때 잠시 보는 볼거리 정도로 여겨진다. 사정이 그러하니 경영으로서의 문화를 애써 말하는 신간 『예술경영』(김주호 등 지음, 김영사)등은 거의 안쓰럽다. 수요층의 절대 부족현상 때문이다.

매년 미대·음대 문을 쏟아져 나오는 수천여명 대졸자들이 최소한의 예술 향수(享受)계층으로 연결되지 못하니 이 사회는 도무지 축적이 없는 동네다. 그게 바로 한국인데, 의외로 많은 이들이 공유하는 문화에 대한 허구적 이해는 그 때문이다. "먹고 살기 바쁜데 웬 문화?"라는 편견 말이다.

즉 무언가 고상한 것, 삶과 무관한 공허한 장식을 예술로 아는 고정관념이 그렇다. 그건 19세기식 개념이다. 보자르, 즉 아름다운 예술(les beaux arts)이란 말은 이미 사라졌다. 고급·저급, 순수·대중의 구분도 용도폐기됐다. 지난 주 리뷰한 책 『김민수의 문화 디자인』(다우)에서도 지적되듯, 그리고 폴록·워홀의 행위에서 보듯 예술은 '삶과 같은 예술'(life-like arts)로 패러다임이 변했다. 우리의 삶 전체를 성찰케 해주는 대안의 삶이 바로 문화라는 얘기다.

바로 그 대목이다. 문화란 이제 치료제다. 압축성장에 쫓겨 골다공증에 걸린 한국사회의 골밀도를 채워주는 최선의 약(藥)이다. 문화가 더 이상 장식이거나 선택이 아니라는 말이다. 임옥상이 한반도의 상징인 매향리의 포탄껍질을 소재로 한 작품을 내놓는 것도 그 맥락일 게다. 그가 포탄을 해체시켜 만든 '문화의 보습'은 우리 삶을 되새김질하는 효과적인 도구다. 문화의 달이라는 10월 잠시 책과 함께 짧은 생각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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