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편의시설이 불편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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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비싼 돈 들여 만들면 뭐합니까. 장애인들이 제대로 사용 못하면 헛돈만 쓴 셈이지요."

중앙일보 독자 박종태(朴鍾泰·45)씨는 많은 예산을 들여 겉포장만 그럴싸한 장애인 편의시설에 불만이 많다. 16세 때 교통사고로 2급 장애인이 된 朴씨는 인공관절을 삽입한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10년째 전국을 누비며 장애인 시설을 점검해 왔다. 24일 기자와 함께 지하철역 장애인 휠체어 리프트 등을 꼼꼼히 살펴본 朴씨는 "과거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장애인 입장에서 만들어지지 않아 무용지물이 된 편의시설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헷갈리는 교차로 음성신호기=교차로 음성신호기는 건널목에서 시각장애인이 소지한 리모컨을 누르면 현재 신호 상태에 대한 정보가 신호등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음성으로 나오는 장치다.

朴씨와 함께 마포소방서 앞 삼거리의 음성신호기를 점검해봤다. 스위치를 누른 순간 바로 앞 신호등뿐 아니라 삼거리에 세워진 모든 신호등의 음성신호기가 동시다발적으로 울리기 시작했다. 朴씨는 "소리에만 의지하는 시각장애인이 큰 사고를 당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서울시내 교차로 가운데 음성신호기가 설치된 곳은 37.9%에 불과하다. 그나마 고장나거나 교통소음, 노점상 음악소리, 동시다발 작동 때문에 제대로 음성 신호를 인식할 수 없는 곳이 태반이다.

◇허술한 안전고리·벨트=서울시는 지난 5월 발산역 장애인 휠체어리프트 추락 사망사고 이후 지하철 1∼8호선역에 설치된 휠체어리프트 4백34대에 추락방지용 안전벨트와 고리를 설치했다. 그러나 손을 마음대로 쓸 수 없어 직원 호출버튼을 누르기도 힘든 중증 장애인의 경우 주위 도움없이 고리와 벨트를 연결하는 것은 무리다.

朴씨는 "상당수 지하철역의 휠체어리프트가 청소도구 등을 운반하느라 자주 사용돼 잔고장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비좁은 장애인용 승강기=지난해 설치된 서울시 양천구 금옥여중 앞 육교 장애인용 승강기를 朴씨와 함께 타봤다. 승강기 공간은 일반 휠체어가 겨우 들어갈 정도여서 경추장애인용 침대형 휠체어를 넣으려 했더니 머리부분이 걸려 문이 닫히지 않았다.

현재 시내 육교나 공공기관에 설치돼 있는 승강기는 이와 비슷한 크기다. 지하철역에 설치되어 있는 장애인·노약자용 엘리베이터는 거의 다 12인승이어서 조금 넓지만 朴씨는 "침대형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고 보통 휠체어가 승강기 안에서 어느 정도 움직이려면 최소 15인승 이상은 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끄러운 스테인리스 보도블록=시내 대형빌딩 앞 인도에는 스테인리스로 된 점자 유도블록이 깔려 있다. 점자 유도블록은 시각장애인이 교차로나 길이 갈라지는 지점을 분별할 수 있도록 표면을 볼록하게 처리하며 저시력 장애인도 알아보도록 노란색으로 제작된다. 하지만 최근 대형 빌딩 앞 인도는 미관을 이유로 스테인리스 제품이 유행처럼 설치되고 있다.

朴씨는 "스테인리스 제품은 미끄러운 데다 저시력 장애인에게 도움이 안된다"며 "건물주가 장애인 입장을 고려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종태 독자, 김필규 기자

phil9@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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