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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디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솔직하게 말하면 소련을 위시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은 모두 개혁을 한다고 하다가 붕괴된 것입니다. 우리는 개혁하지 않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년전, 어느 국제회의에서 만난 북한 외교관의 말이다.

그는 또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처음부터 김일성 수령님의 지도하에 매일 매일 개혁해 왔기 때문에 이제 그 무슨 개혁을 한다고 떠들 필요가 없습니다."

북한 외교관의 말이 지금 새삼스럽게 생각 나는 이유는 최근에 북한이 변화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가 과거에 동유럽 국가들이 시도했던 종류의 개혁인지 아니면 북한이 '매일 매일' 한다는 수준의 '개혁'인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러니까 북한은 지금 체제와 구조를 새롭게 하는 변혁을 추구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전술적 목표(예:일본의 경제협력)를 위해 외형적인 조정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직 판단하기 어렵다.

많은 사람들은 북한이 이번에는 진정으로 개혁의 길로 나오고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가령 예를 들면 북한이 가격과 환율을 현실화하기로 결정한 것을 보고 경제운영뿐만 아니라 경제체제 자체도 변하고 있다고 믿는다.

정반대의 해석도 있다. 북한을 여러번 방문하면서 그곳의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접해본 어떤 분에 의하면 북한은 절대 개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개방은 곧 김정일의 권력에 위협이 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북한은 바로 이와 같은 문제의식 때문에 아직까지도 지시경제와 세습통치체제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현 상황하에서 북한 통치자들도 그 어떤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북한은 그동안 '고난의 행군' 등을 외치면서 견딜 수 있는 데까지 견뎌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대로 있을 수만은 없는 상태까지 온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김정일의 이름으로 개혁을 부르짖을 수도 없는 것이 그들의 사정이다. 지금까지 최고 통치자의 이름으로 개혁과 개방을 규탄해 왔는데 지금 와서 갑자기 방향을 1백80도 바꾸면서 개혁을 지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김정일은 경제개혁을 시도하는 경우에도 그것을 개혁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경제운영 방식의 개선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군부의 역할도 문제다. 지금까지 북한 외교관들은 군부 때문에 중국이 강경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자주 말해왔다. 그렇다면 김정일은 군이 변화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방을 추진한다는 것인지, 그렇지도 않으면 원래부터 '군의 반대' 운운은 그들의 기만전술이었는지 분명치 않다. 만일 군을 설득했다면 그 논리가 문제가 되고 군이 아직도 반대한다면 변화의 한계가 문제된다. 그리고 처음부터 군이 강경보수라는 말이 거짓이었다면 북한체제의 신뢰도가 문제가 된다. 군의 경우 북한체제가 잘못돼 수정해야 한다는 설득논리는 불가능했을 것이고 오늘의 국제정세하에서 북한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이런 저런 전술적 조정이 필요하다는 논리는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북은 체제개혁이 아니라 전술적 조정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만일 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이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면 앞으로 북한체제의 안정이 문제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북한이 개혁·개방의 길로 나오기로 결심했는지 아니면 과거에 늘 그랬던 것처럼 단기적인 이익을 위해 전술적인 제스처만 보여주고 있는지 아직은 확실하게 답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느 경우에도 북한의 장래는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한반도 사태가 정상화 및 합리화될 때까지 냉철하고 신중한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사회과학원 원장·고려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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