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세계 접목에 테크노 음악 제맛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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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비열하고 남루한 이 세상을 잊고 싶을 때,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음악은 무엇일까? 1960년대라면 몽환적인 사이키델릭이겠지만, 지금은 반복적인 리듬으로 몽롱하게 파고드는 테크노 음악이다. 귀를 찢을 만큼 울려대는 테크노 음악을 들으며 밤을 꼬박 지새우는 레이브 파티는 세상의 근심과 시름을 잊게 만든다.

가상 현실이란 것도 마찬가지다. 초라한 '나'와는 달리, 가상 현실 속에서는 희대의 영웅도 악인도 원하는 대로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현실을 잊어야 한다. 테크노가 그것을 도와준다. 현실과 가상 현실의 경계 자체가 없음을 보여준다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감독 장선우)의 음악을 맡은 달파란 역시 테크노 뮤지션이다.

영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화면은 유치하고 조잡하다. 일반적으로 환상적인 게임의 액션 장면이라면 거칠면서도 화려하게 밀어붙여야겠지만, 장감독은 의도적으로 다른 영화를 패러디하면서 조금은 유치하게 장면을 꾸몄다.

음악도 그런 의도적인 조잡함을 따라간다. '접속을 원하시면 1번을 누르세요'는 예전의 오락실에서 들리던 게임 음악을 떠오르게 하고, 절친한 친구 사이인 주(김현성)와 이(김진표)가 격투를 벌이는 '주와 이'는 전형적인 스파이물의 긴박한 리듬을 차용한다.

달파란의 음악은 그러나, 몽환적이지는 않다. 반복적인 리듬에 빨려들 것도 같지만, 유치한 효과음들이 딴지를 걸면서 이건 '가상'의 현실임을 깨닫게 만든다. 영화는 현실과 가상 현실 어느 것도 내버리지 않고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는데, 그 모호함 덕에 오히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음악은 돋보인다.

달파란의 본명은 강기영. 그는 록밴드 시나위와 H2 O, 펑크 밴드인 삐삐 밴드를 거친 풍운아다. 요즘은 테크노를 주업으로 하고 있지만 그의 손끝에서는 어떤 장르의 음악이건 세련되게 흘러나온다.

영화 속 성냥팔이 소녀(사실은 라이터를 팔지만)가 사랑하는 가수 가준오(강타)의 테마송으로 나오는 '섬'은 전형적인 록 발라드다. '섬'은 최근 몇 년간 만들어진 록발라드 중에서 첫 손가락에 꼽힐 만큼 애절하다.

장선우 감독과 달파란이 쓴 '구하지 마라 그럼 행복할 거야 정말 하지만 그렇지 않은 우리는 뭐야 대체 얼마나 아파야 하나 얼마나 다쳐야 하나'라는 구도(求道)의 가사는 자연스럽게 성냥팔이 소녀와 가준오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회한으로 들린다.

음반에는 이 곡이 세 가지 버전으로 실려 있는데, 영화 속 가준오의 공연 장면을 그대로 담은 버전이 가장 절실하게 들려온다. 애절하기로만 따지면 '라이터 사세요'도 빠지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유랑악단을 연상시키는 꿍딱거리는 음악이 하얀 눈과 함께 소녀의 몸을 덮는다. 그 애절함이 사실 이 영화의 주된 정조지만, 음악 말고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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