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차완'전설을 빚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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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4백년 전 이름없는 한 도공의 혼이 경남 하동에 훌쩍 내려앉았다. 일본 차인(茶人)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도차완(井戶茶碗)의 전설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14년간 조선 찻사발의 재현을 위해 이 땅 곳곳을 헤맸던 길성(吉星·58)씨는 하동에 와서 첫 가마를 열며 "잘 나왔다"고 무릎을 쳤다.

우리에겐 조선시대 막사발로 더 익숙한 그릇이다. 일부에선 개 밥그릇이라고 부르며 천하게 다루는 바람에 보존되지 못했다. 그런데 그 물건이 일본에선 이도차완이라는 이름으로 국보급 대우를 받고 있다. '막사발의 재현'을 신앙처럼 삼았던 소설가 겸 차완 비평가 정동주씨의 집념이 아니었더라면 오늘 이 자리가 없었을 터다.

'길성 요지(窯趾)'의 든든한 일꾼이자 조수인 딸 기정(基貞·32·위 사진)씨도 가마에서 그릇을 내며 긴장했던 얼굴을 풀었다. 19세 때부터 조수로 물레질을 한 그가 이제 당당히 아버지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가슴을 폈다. 지난 1년여 곁에서 이들 부녀를 지켜본 정동주씨는 "한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일이 아버지와 딸의 핏줄 속에서 완성됐다"고 제 일처럼 기뻐했다. 10여가지 색깔로 빛나는 도자기를 하나 하나 들여다보던 정씨는 "이 그릇 속에 한국인의 마음 빛깔이 다 담겼다"고 푸지게 웃었다.

며칠 전 초가을 하늘이 맑은 경남 하동군 진교면 백련리. '길성 요지'가 오름 가마를 열던 날은 일본에서 온 손님들도 이 자리를 지켜봤다. 도자기 전문가로 이름난 하야시야 세죠(전 도쿄박물관 학예실장)는 "이게 왜 이리 가볍습니까"란 질문으로 이도차완의 전통이 부활했음을 인정했다.

"그릇인가, 종잇장인가"라고 되물은 마야타마 오사카 동양도자박물관 학예사도 찻사발을 든 손을 가볍게 떨었다. 사뿐하게 손바닥에 착 감기는 이도차완을 들고 길성씨는 "그거 아름답다고 말하지 마소. 속 좀 썩고 나온 거니까 미완성의 완성일 뿐이야"라고 손사래를 쳤다. "보면 투박하고 만지면 부드러운 그 푸근함이 어찌 그리 한국인들 가슴을 그대로 닮았을까." 뒤돌아선 길씨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한마디에 손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길성씨가 이도차완에 도전한 것은 분청과 백자·청자를 두루 섭렵하며 한국 도자기의 내력을 꿰뚫고 난 뒤였다. 홍익대 미대를 나와 그림을 그리다 도예로 길을 튼 길씨는 엄격하고 정확한 중국 자기와 달리 살아 숨쉬는 한국 자기의 비밀은 바로 그 태토에 있다는 걸 일찌감치 몸으로 체득했다.

"흙이 99%고, 기술은 1%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흙을 찾아 도깨비마냥 떠돌았어요. 흙과 내가 한 몸이 되지 않으면 제대로 된 도자기는 만들지 못해요. 충북 단양을 떠나 지난 5월 이곳 하동 흙을 밟는 순간 '이거다'고 알아봤어요. 하동 찻사발은 이제 내 생명이자 신념입니다. 다행히 딸자식이 내 뒤를 잇겠다니 1%의 완성을 위해 죽는 날까지 애쓸 따름이지요."

이번에 '길성 요지'에서 쓴 흙은 알갱이가 굵으면서 균일해 입자 사이의 공간이 뜨기 때문에 가볍고 습기를 먹으면 색깔이 변하는 특성이 있다. 차를 따라 마실수록 찻잔 색이 변하는 까닭이다. 이도차완이 차 맛이 특별하고 몸에 좋아 기(氣)를 발산하는 그릇으로 알려진 원인이기도 하다.

이 찻사발들이 첫 서울 나들이를 한다. 11월 18일부터 24일까지 서울 태평로 갤러리 코리아(02-774-1366)에서 열리는 '길성 부녀 하동 찻사발'전이다. 차와 다기 전문가인 성우 스님이 대표로 있는 불교 TV가 이들의 공력 깃든 작업을 지켜보다가 초대전을 마련했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들에게 이 찻사발을 바칩니다. 흙은 우리가 잠시 빌려쓰다 가는 몸에 가장 가까우니 이 흙그릇을 잡고 앉으면 마음이 참 좋습니다." 조선 도공의 무심한 얼굴을 닮은 길성씨가 찻잔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경남 하동=글 정재숙 기자·사진 권태균

이도차완은…

이도차완(井戶茶碗)은 16세기말,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헌상돼 유명해진 찻사발이다. 1951년 '기자 에몬이도' 차완이 조선 도자기 가운데 유일하게 일본 국보로 지정돼 격조높은 미술품의 대명사가 됐다.

비파색을 띤 부드러운 색상, 자연스런 물레 자국, 힘있게 앉은 매화피(그릇 밑굽의 볼록한 받침대), 고대의 과감하고 단순한 처리 등으로 중국과 일본 자기를 뛰어넘는 한국인의 독특한 미적 표현으로 평가받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 이도차완을 정적들에게 보내 협상·동맹·신뢰의 증표로 썼다는 전설같은 역사가 전해진다.

이번에 길성 부녀가 재현한 이도차완은 일본 전문가들이 감식해 거의 진품을 되살렸다는 평가를 받았고, 일본 순회전 제안을 받은만큼 앞으로 전통 이도차완의 잣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유약의 '터짐' 현상이나, 굽이 새카맣게 된 모습 등이 그 증거로 꼽힌다. 특히 철분 성분이 거의 없는 태토의 특성 때문에 가마 안에서 산소와 결합한 철분이 날아가고 난 흙 속의 다양한 금속 성분이 흘러나와 일군 황토색에서 청회색에 이르는 다양한 비파색이 눈부시다.

흔히 흰 빛 일색으로 알려졌던 조선 자기가 실은 이렇게 놀라운 색채의 마술사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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