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수의 문화 디자인』:디자인이여, 침을 뱉어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책 제목이 '김민수의 디자인 문화'로 돼 있다면 이 책은 디자인 입문서 쯤의 범용한 책에 불과했을 것이다. 단어의 앞뒤를 바꿔 '문화 디자인'으로 했기 때문에 상황이 대뜸 바뀐다. 그것도 도발적 분위기로 변했다. 즉『김민수의 문화 디자인』(다우)은 2000년대 초반 한국이라는 엽기 공화국의 볼썽사나운 풍경을 대상으로 한 '맞짱뜨기'다. 책이 시종 한국의 시각문화를 포함해 인문학적 상황 전체를 문제삼는 논쟁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삶을 병들게 할 뿐만 아니라 정신마저 실종된 디자인"은 여지없이 통박당한다. 무지한 제도와 우상숭배적 논리에 인맥·학맥에 얽힌 문화 영역의 먹이사슬 구조도 비판된다(51쪽). "중증 질환의 한국호(號) 문화 상황"을 효과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저자는 간혹 소설가 박태원의 세태소설 주인공 구보씨를 가장해 2000년대 엽기세태를 디자인의 눈을 통해 어슬렁거리며 들여다 본다. 그 때문에 "위선, 가식, 몰상식으로 치닫는 3류 한국사회"(79쪽). 등의 독설이 책의 곳곳에 보인다

이런 비판은 내공의 뒷받침이 없을 경우 자칫 돈키호테식 분풀이에 그친다. 허무주의를 부추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최근 나온 문화 관련서 중 으뜸으로 꼽을 만하다. 두가지 이유 때문이다.

저자에게 디자인이란 '문화적 상징의 해석과 창조'로 정의되는 큰 개념이다. 차고도 넘치는 물질풍요 속의 빈껍데기 형식에 마음을 담는 그릇이 바로 디자인이다. 화석화된 예쁜 그림 혹은 도안(圖案), 아니면 박정희식 개발 시대 이래 디자인계에 부과된 '산업화의 공병대' 역할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 책이 각별한 이유는 김민수 디자인론의 핵심에 도발적 성격의 전복성, 그것을 뒷받침하는 인문정신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런 열린 디자인 정신으로 무장한 그는 스스로를 유배객으로 비유한다. 김민수는 누구인가. 선배 교수의 친일행적을 비판한 괘씸죄로 서울대에서 축출당한 뒤 4년째 복직투쟁 중인 전직 교수 신분이다(박스 기사).

이런 마음고생 속에서 저자는 엽기사회 한국을 바라보는 비판적 거리를 확보한 셈인데 그건 바꿔 말하면, '주류에 함몰되지 않은 독립적 지식인'의 모습이다. 여기에 문장 운용의 묘를 터득한 논객이 세상을 향해 '침 튀기는' 발언은 책 보는 이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다.

저자가 바라보는 3류 사회 한국의 엽기세태는 수두룩하다. 지난해 올림픽대교에 성화를 상징하는 10억원짜리 대형 조형물을 올려놓다가 헬기가 추락하는 사고를 부른 환경미화 수준의 전시행정이 그 대표적이다. 교량 디자인과 시공이 아름다우면 될 것을 썰렁한 조형물을 옥상옥으로 올려놓으려는 썰렁한 장식주의, 급기야 사고로 인명 피해까지 몰고왔지만, 그누구도 그책임을 묻지 않고 있는 촌극은 한국적인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여기에 거품 투성이의 한류(韓流)열풍에 대한 비판과 속빈 강정 한국문화의 상황에 대한 고발, 신파에 다름아니었던 2년 전 서울시 주최 '미디어시티 서울 전시회'에 대한 야유도 정곡을 찌른다. 특히 서울올림픽을 포함한 역대 올림픽의 엠블럼 디자인 비교를 통해 '디자인의 촌동네' 한국을 보여준 대목은 설득력이 크다.

『김민수의 문화 디자인』이 뛰어난 저술이라는 점은 이런 야유와 비판이 갖는 우상파괴적 속성 때문만은 아니다. 이 책에서 눈여겨볼 만한 점은 제3장 '사람의 디자인'편. 이미지의 시대로 바뀌면서 문자 중심의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지만, 그것을 과연 위기로 봐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 디지털 문화의 시대에 예술의 활로에 대한 문제제기 등은 이 방면의 핵심적 제안으로 읽힌다.

"인문학자들이 이미지 시대가 왔다고 학문 위기를 말하는 것은 대단한 엄살이 아닐 수 없다. 외려 가상공간, 하이퍼 텍스트 등의 새로운 미디어 출현은 문자 위주 지성계에 '지적 상상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과연 이것이 지성의 몰락으로 볼 수 있을까? 유일한 길은 예술·인문학·과학과 기술의 전통적 경계선을 가로지르는 학제(學際)연구로 전환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대학에는 이미지 시대의 문화를 아우르는 모델이 존재하지 않는다."(1백66~1백68쪽 요약)

말로만 거론되는 '문화의 세기'에 그중 요긴한 기여를 할 만하고, 그만큼 아우르는 영역이 많은 통합적 사고로 엮어진 것이 이 책인데, 당장 이 저작물을 보고 공부했으면 싶은 사람들은 두 종류다. 문화행정 고급관료, 지자체 간부들이 그들이다. 적지않은 암시를 얻을 수 있고, 이를 통해 흉물스런 엽기 한국의 수준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우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