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팔이소녀의재림>무관심한 이웃을 난사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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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지난 9일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시사회장에서 장선우 감독은 "내가 죄인이다. 이번 영화로 영화사가 존폐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투자자에게 죄송하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한국 영화사상 최고 제작비인 1백10억원(마케팅비 포함)을 지난 3년간 투입하고, 또 개봉이 수차례 연기되면서 충무로에 악성 루머가 널리 퍼졌던 것을 의식한 말이었다.

시사회 뒤 장감독은 "5년 전에 작품을 구상했다. IMF 관리체제의 우울한 시대상에 당시 일기 시작한 게임 열풍을 접목했다. 게임 속에서나마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무엇보다 카오스(혼돈)이론에 크게 의존했다"고 밝혔다.

장감독은 "베이징(北京) 나비의 가녀린 날개짓이 지구촌 반대편 뉴욕에서 폭풍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이른바 '나비효과'를 인용하며 카오스 이론을 설명했다. 불규칙하고 무질서해 보이는 움직임 속에도 규칙적인 인과관계가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성냥팔이…'은 컴퓨터 게임을 소재로 현실과 환상(가상현실)을 넘나들며 얘기를 펼친다.

전자오락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희미(임은경)가 게임 속에선 라이터를 파는 가련한 소녀로 변하고, 또 현실에서 희미를 짝사랑하던 주(김현성)는 얼어붙어 죽을 운명으로 프래그램된 '라이터 소녀'의 구출 작전에 나선다.

장감독은 또 영화 속에 두 개의 결말을 제시하는 '한 작품, 두 영화'란 특이한 실험을 하며 게이머에 따라 상이한 결과가 빚어지는 게임의 '멀티 엔딩' 구조를 차용했다.

영화는 어떤 한국영화에도 뒤지지 않는 액션을 선물한다. 기관총 난사는 기본이고, 탱크·미사일·헬기·레이저총이 등장하며, 차량 폭발 장면도 스케일이 크다. 오토바이와 자동차의 긴박한 추격신 등 속도감도 갖췄다. 컴퓨터 그래픽도 정교한 편이다.

게임 시스템에 오류가 발생, 라이터를 사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무차별로 총을 발사하는 '라이터 소녀'는 자기 잇속을 차리기에 바빠 이웃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우리들을 향한 매서운 경고일 수 있다. 감독 자신은 "정치적·사회적 메시지를 강조한 영화가 아니다"고 말했지만….

게다가 주가 '라이터 소녀'를 구해내려고 컴퓨터 시스템에 침투하는 순간 보이는 『금강경』의 한 구절, 즉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모든 모습이 모습이 아님을 본다면 본디 그러한 모습을 보리라)에 이르면 철학적 무게감까지 감지된다.

그런데 '성냥팔이…'은 당혹스럽다. 무엇보다 집중력이 부족해 보인다. 영화에 빠질 때쯤이면 다른 에피소드로 건너뛰는 구조 때문이다. 빈번하게 등장하는 자막(게임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이 몰입을 방해하며, '라이터 소녀'와 주를 둘러싼 주변 인물의 관계도 모호하다. 감독의 자의식이 강하게 노출된 반면 드라마는 숙성되지 않은 느낌이다.

홍콩의 무술 전문가를 대거 초청해 만든 공중 회전신, 벽타고 뛰기 등의 현란한 동작과 날아가는 총알을 정지한 것처럼 보여주는 장면 등은 '매트릭스'에서 충분히 보았던 것이다. '매트릭스'의 패러디가 감독의 창의성을 훼손한 건 아닐지….

주요 관객층도 애매해 보인다. '성냥팔이…'은 게임에 문외한인 기성세대에겐 일종의 허탈감을, 또 게임에 익숙한 신세대에겐 소화하기 어려운 부담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13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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