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가지 메뉴뿐인 한국시장 'B급 영화'가 일어설 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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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1998년 무렵 일이다. 서울극장 곽정환(72)대표가 기자들을 점심에 초대했다. 곽대표가 누구인가. 일반인에게는 왕년의 여배우 고은아씨 남편이라고 소개해야 빠르겠지만 영화계에서는 '숨어있는 권력자'로 통한다. 전국 요지에 다수의 극장을 소유하거나 자신의 영향권 아래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하고 재미있는 작품이라도 적기(適期)에, 목이 좋은 영화관을 못 잡으면 '꽝'이다. 곽대표는 이 막강한 배급력으로 많은 영화인들이 '머리를 조아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좀체 언론에 노출되기를 꺼렸다.

그날 광화문의 한 양식당에서 만난 그가 막바지에 농담처럼 툭 한마디 던졌다.

"기자분들, 내가 돈 버는 비결 하나 가르쳐 드릴까? 앞으로 5년 안에 에로물 영화 시장이 상당히 커질 거요. 지금부터 준비하면 큰 돈 만지게 될 거요."

그 즈음 영화의 표현을 제한하는 사전심의제도가 위헌이라는 판결이 났다. 곽대표는 이런 시대 분위기를 읽고 '앞으로 성인영화 전용관이 많이 생겨날 테니 에로영화는 돈이 된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로부터 4년이 흘렀다. 족집게 같은 그의 예지력도 이번엔 과녁을 빗나간 것 같다. 아직 어느 한 곳에도 성인영화 전용관이 없고 그러니 에로영화를 만들어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도 들리는 바 없다.

그러나 당시 곽대표의 말을 들었을 때 일견 수긍가는 부분이 있었다. 일본은 1970년대 초입부터 영화산업이 퇴조했다. 이에 5대 메이저사 중 하나인 니카쓰(日活)는 '로망포르노'라는 신종 장르를 개발했다. 적은 비용과 극히 짧은 기간의 촬영으로 애정물을 만들어 전국의 극장망을 통해 공급했던 것. 이 전략은 적중해 AV(성인비디오)에 밀리게 되는 80년대 중반까지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현재 활동 중인 유능한 감독들 중 일부도 이 장르 출신이다. 예컨대 '셸 위 댄스'의 수오 마사유키나 구로사와 기요시 등이 그렇다. 이들은 제작비로 3억원을 넘기지 않고, 촬영도 3주 안에 모두 끝낸다. 그래서 단편 몇 편 만든 뒤 곧장 장편 연출에 뛰어드는 한국의 신인 감독들보다 현장 장악력이 훨씬 뛰어나다. 로망포르노로 연출술(術)을 수련하는 것이다. 최근 에로비디오를 15편이나 만들었던 봉만대(32)감독이 극장용 영화에 데뷔한다 해서 화제가 됐다. 비디오 연출 경험도 약이 되겠지만 아무래도 35㎜ 필름으로 찍어본 것과는 다르다.

로망포르노류의 영화가 지금 한국에서 성공하리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이 장르를 원용한 제작방식, 즉 B급 영화의 토대가 없다는 게 유감스럽다는 거다. B급 영화는 저예산영화나 예술영화가 아니다. 어찌 보면 옛날 2편 동시상영 극장을 채우던 '싸구려 영화'에 가깝다. 그러나 거기에는 1년 넘게 시나리오를 다듬고 스타급 배우 캐스팅하느라 또 1년 넘게 허송하는 A급영화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궁핍의 미학'이나 비순응적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때깔 좋은 영화들은 기껏해야 진부한 가치와 형식을 후렴처럼 반복하지 않던가.

지금 한국영화는 양극화돼 있다. '크게 질러서 크게 먹자'는 속칭 '대박주의'와 일반 영화관에서 상영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순정한 전투정신, 혹은 아마추어리즘으로 일관하는 독립영화.

지금이 B급 영화를 활성화하기 위한 최적의 시기인 것 같다. 복합상영관에 밀린 재래식 극장들이 널려 있고, 국내외에서 공부한 예비 감독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이것은 곽대표처럼 튼튼한 극장망과 자본을 가진 영화사가 나서줘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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