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준 의원의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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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미국의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한 연설 중에서 '내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고 한 구절을 기억하실 겁니다. 저에게도 꿈이 있습니다. 제 이름에는 '꿈 몽(夢)'자가 들어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후원회 모임에서 정몽준(鄭夢準)의원은 자신에게도 꿈이 있다고 말했다. 그 꿈이 무엇인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월드컵 4강'의 꿈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내달 10일께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할 예정이라고 한다.

20세기 세계 정치사에서 재벌총수가 대권(大權)에 도전해 성공한 예는 거의 없다. 1992년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미국에서는 억만장자 로스 페로, 한국에서는 정주영(鄭周永)현대그룹 창업주가 나란히 대권에 도전했지만 둘 다 실패로 끝났다. 사실상 유일한 예외가 이탈리아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경우도 이탈리아의 고질적인 정경유착과 뿌리깊은 부패구조, 대중추수적인 포퓰리즘 문화에 상황논리가 더해진 기형적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듯싶다.

독일의 권위지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이 28일자에서 지적했듯이 鄭의원은 대권에 도전하기에 최상의 여건에 있다. 국민경선이란 민주적 절차를 거쳐 선출한 후보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도 모자랄 판에 민주당은 후보를 흔들어대기 바쁘다. '병풍(兵風)'으로 급소를 찔린 한나라당도 제정신을 못차리고 헛발질을 해대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병석에 누운 왕을 옆에 두고 훈구파와 사림파가 맞붙어 벌이는 사생결단의 드라마가 4백년이 지난 지금도 똑같이 재연되고 있으니 국민들 가슴에 남는 것은 환멸의 응어리뿐이다. '월드컵 4강'의 특수효과에 어부지리(漁父之利)가 겹쳤으니 鄭의원으로서는 '천운'이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본인이 뭐라 하든 그는 한국에서 가장 돈이 많은 정치인이다. 국회에 신고한 재산만 1천7백20억원이다. 대주주 지분정보 제공업체인 에퀴터블이 최근 발표한 '한국의 1백대 부호'중 27위에 올라 있다. 스스로는 13대 국회 때부터 국회의원으로 활동해온 정치인이지 재벌총수가 아니라고 강변하겠지만 보통사람들 눈에도 그가 단순히 돈많은 정치인으로 비칠까.

부자라고 정치를 못하란 법 없고, 대권에 도전하지 말란 법도 없다. 남에게 손 벌리지 않아도 되니까 오히려 깨끗한 정치가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선친도, 페로도 대권의 꿈을 끝내 못이룬 것은 돈과 권력의 상관관계에 대한 보통사람들의 부정적 인식의 벽을 넘지 못한 탓이라고 봐야 한다.

그는 후원회 인사말에서 "대한민국을 떠나 외국으로 이민가겠다는 젊은이들이 오늘의 생활이 고달파서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정치인들 책임"이라고 말했다. 옳은 지적이다. 돈 가진 자가 권력까지 갖게 되는 사회에서 과연 젊은이들은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진정 그가 꿈을 이루고 싶다면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한다.'월드컵 4강'으로 이미 그 꿈의 절반쯤은 준 게 아니냐고 자부한다면 그것은 순진한 착각이다. 부모 잘 만난 재벌2세의 한 명으로 보는 세간의 따가운 시선에 대한 확실한 입장과 소신을 밝혀야 한다. 우리 정치판의 고질적 부패구조와 사생결단식 붕당구조를 바로잡을 수 있는 비전도 제시해야 한다. 그렇고 그런 사람들을 끌어모아 신당을 만들어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천운을 믿고 꿈에 도전한다면 선친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크다. 대권 도전을 선언하기에 앞서 그런 비전을 내놓을 자신이 있는지 스스로 냉정히 판단해 주길 바라는 것이 비단 나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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