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14>제103화人生은나그네길:18. 주제가 전성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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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진고개 신사'에서부터 '하숙생'이 나올 무렵까지 참으로 많은 내 노래가 나왔다. 1963~65년 사이의 일이다. 이 가운데 '맨발의 청춘'이 중요한 획을 그은 셈이었지만, 이것말고도 고만고만한 작품들이 부지기수다.

가사가 검열에 걸려 판금 당한 '월급봉투'(김호길 작곡)를 비롯해 '엄처시하'(홍현걸 작곡),'길 잃은 철새'(최창권 작곡),'잃어버린 태양''뜨거운 침묵''위를 보고 걷자'(이상 이봉조 작곡),'샐러리맨 출세작전'(홍현걸 작곡),'광복 20년'(김광수 작곡) 등이 이 무렵 나온 대표곡들이다.

이 노래들은 당시 유행하던 라디오 드라마나 영화의 주제가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엄처시하'는 MBC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이었으며 '길 잃은 철새'는 TBC 드라마인 '특호실 여자 손님'의 주제곡이었다. '길 잃은 철새'의 작곡가인 최창권 선생은 내가 대중에게 알려진 첫 무대였던 '세계의 휴일' 공연 때 악단의 지휘를 맡은 사람이다. 그는 서울대 음대를 다닌 정통파였다.

또한 '잃어 버린 태양''위를 보고 걷자'는 같은 이름의 영화 주제곡이었으며, 직장인들의 출근 무렵에 방송돼 인기를 끈 '샐러리맨 출세작전'과 '광복 20년'은 각각 MBC와 TBC의 라디오 드라마였다. '진고개 신사'의 심영식이 노랫말을 지은 '뜨거운 침묵'도 사형수의 사랑 얘기를 담은 KBS 드라마였다.

이런 주제가 홍수는 60년대 가요계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당시는 방송국 개국이 급물살을 타던 시기였다. 문화방송(MBC·61년)·동아방송(63년)·동양방송(TBC·64년) 등이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다. 이전에 나온 KBS를 포함해 다채널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TV 채널도 KBS·TBC·MBC 순으로 생겨났다. 60년대 이미 3개 TV채널 시대로 자리잡게 된다. 61년 남산의 KBS 스튜디오(지금 영화진흥위원회 시사회실)에서 열린 개국 쇼에서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를 부른 기억이 난다.

이런 대중 매체를 타고 전달되는 영화나 라디오 드라마가 이전의 서민 오락물이었던 악극단 쇼를 밀어내던 때가 바로 60년대 이 무렵이었다. 해방 이후 엄청나게 인기를 끌었던 여성국극도 이런 기운을 감당하지 못하고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런 격변의 와중에서 해방 이후 세대를 중심으로 일제시대와는 다른 문화의 토양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전에도 말했듯이 가요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위 'GI(미군)문화'의 유산이라는 일부의 비난 속에서도 서양의 팝을 발전시킨 '새로운 음악'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 그런 문화 형성에 미8군 쇼 출신과 '학사가수'들이 크게 기여했다. 손석우 등 작곡·작사가들의 노력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아무튼 당시 방송 환경의 변화로 라디오 드라마의 인기는 특히 대단했다. 주제곡을 부르면 부르는 대로 히트로 연결됐다. 천운을 타고 났는지,노래를 잘 했다기보다도 이런 배경 덕에 나는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이런 기회가 '가수 최희준'을 만든 셈이다.

"열아홉 처녀 때는 수줍던 그 아내가/첫 아이 낳더니만 고양이로 변했네/눈 밑에 잔주름이 늘어 가니까/무서운 호랑이로 변해 버렸네/그러나 두고보자 나도 남자다/언젠가 내 손으로 휘어잡겠다/큰 소릴 쳐보지만 나는 공처가."

김석야 작사의 노래 '엄처시하'다. 아내의 변천사를 아주 코믹하게 표현했다. 리듬은 맘보나 차차차 뒤에 나온 도돔바였다. 당시는 물론,지금도 사나이들 사이에서 즐겨 불리는 노래다.

이같은 서민들의 희망과 해학은 당시 '신가요 운동'의 주요 소재였다. '엄처시하'보다 2년쯤 뒤에 나온 김상희의 그 유명한 '대머리 총각'도 이런 흐름에서 나왔다. 희망이 단순한 상상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 속에 있다는 것을 은유한 노래들이다. 비록 내 노래는 아니지만 '대머리 총각'을 부르며 여러분과 함께 가난했지만 정이 있던 그 시절로 돌아가 보고자 한다.

"여덟시 통근길에 대머리 총각/오늘도 만나려나 떨리는 마음/시원한 대머리에 나이가 들어/행여나 장가 갔나 근심하였죠/여덟시 통근길에 대머리 총각/내일도 만나려나 기다려지네."

정리=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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