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2. 안과 바깥 <70>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2면

나중에는 교과서는 아예 빼놓고 내가 읽고 싶은 책들만 가방에 넣어가지고 학교에 갔다. 수업 시간에도 책상 밑에 책을 펼쳐 놓고 읽곤 했다. 학년말이 되어 성적은 엉망이었지만 내가 최초로 썼던 소설이 학생 문예지에 입선되었고, 연이어서 어느 대학의 문예작품 모집에 당선되었다. 이제는 아무개가 소설을 쓴다는 사실이 학교에 모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런 일에 대해서 칭찬은커녕 전보다 더욱 내가 하고 싶어하는 창작을 못 하게 했다.

- 너희 큰외삼촌 봐라. 의지박약한 위인이 의술이라도 있었으니 이런 난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글이나 쓰는 건 어릴 적에 잠깐 취미로 하다 마는 거야. 룸펜 노릇이나 하며 가족들 속을 썩이다가 술로 몸을 망치겠지.

처음 썼던 소설이 '팔자령'이라는 단편이었는데 우리 집에서 일하다가 떠난 순이 누나 이야기였다. 이어서 쓴 소설은 '출옥하는 날'이었다. 이건 우리 동네에 살던 누군가의 형 이야기였는데 작은 잘못으로 소년원에 갔던 아이가 석방되어 집에 돌아오는 과정을 내 얘기처럼 썼다. 그러고도 길고 짧은 단편소설과 단상들을 노트로 몇 권씩 써두곤 했다.

앞에 말했듯이 나는 중학교 때엔 수영반에 들었는데 여름마다 샛강에서 마포 강에 이르기까지 물가에서 살다시피 했던 실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가 있었다. 전국 대회에 나가서 자유형 100m와 200m에서 우승하고 기록도 냈다. 학교에 수영장이 있었지만 수구를 맘껏 연습할 정식 규격이 아니라서 주로 한강에 나아가 연습을 했다. 수구 연습을 할 때면 강 중심에 전세낸 나룻배를 띄워놓고 강을 건너다니며 두세 시간씩 물 위에 떠 있어야 했다. 어느 결에 온몸이 물개처럼 새까맣게 그을었고 얼굴도 가무잡잡해서 원래의 별명이었던 '구라'에다 덧붙여진 별명이 '깜상'이었다. 문예반 아이들은 거의 계집애처럼 온순하고 조용한 편이었고 성격도 나보다 침착하고 어른스러워 보였다. 대개의 체육반 아이들이 그랬지만 특히 수영 수구반에는 불량기 있는 녀석들을 모두 모아 놓은 것만 같았다. 그래서 문예반 아이들보다는 같은 팀이었던 수구 팀의 아이들과 더 친해졌다. 여름 합숙을 천연 풀이 있는 안양과 광나루에서 했고 나중에는 만리포에도 갔는데 물론 코치 선생이 있긴 했지만 집을 떠나 또래의 친구들끼리 한 열흘씩 함께 지내는 기간은 해방기간과도 같았다. 성장기에 운동을 열심히 했던 덕에 나는 이후 건강한 체질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도 이번에는 등산반에 들었다. 당시의 각 학교 등산반에서는 일제 시대 등산 선배들의 전통에 따라서 장단기의 산행 트레킹과 더불어 무엇보다도 암벽과 빙벽 등반을 위주로 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이 무렵에 서로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소년을 알게 된다. 우리 학교 정문의 오른쪽에는 원래부터 언덕이 있었는데 가운데쯤에 아름드리의 느티나무가 섰고 주위로 우람한 활엽수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언덕을 돌아서 비탈로 올라가면 고등학교 쪽이고 왼편 평지 쪽에 중학교 교정이 있었다. 이 언덕을 '꾀꼬리 동산' 이라고 불렀다. 이른 봄에서 초여름까지 그야말로 황금빛 꾀꼬리가 동산의 나뭇가지 사이로 날아다니며 명랑하고 아름답게 노래했다.

그림=민정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