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09>제103화人生은나그네길:13. 연예대 대장 도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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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잠시 해병대 시절 이야기로 시계바늘을 다시 돌리려 한다. 군 시절을 짧게 정리하려 했더니, 옛 동료들이 아쉬운 모양이다. 글을 보고 전화하는 사람이 몇이 됐다. 제대 후 극장 공연 때면 수시로 찾아오던 동료들이다.

고생이 심한 만큼 재미도 있었던 때라 나도 추억이 새롭다. 아직도 주민등록번호를 외듯 군번 '9293744'를 술술 읊어댈 수 있을 정도니 말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공간은 '상남 훈련소'다. 메인 캠프가 있던 진해에서 완전군장을 한 채 도보로 그곳에 갔다. 지금의 창원 근처 어디였다.

진해에서 두달을, 이곳에서 한달을 훈련했다. 막걸리가 이곳의 특산품이었다. 수통에다 막걸리를 가득 넣어 행군 중 목이 마르면 이걸로 갈증을 풀었다. 지휘관에게 들키면 그 즉시 맨땅에 머리를 박았다. 이 훈련장에서는 침투 사격 훈련이 악명이 높았다. 낮은 포복으로 철조망을 통과한 뒤 목표지점을 향해 사격을 하는 등의 훈련이었다. 반복 또 반복. 조교는 조금이라도 성이 차지 않으면 수시로 기합을 주었다.

그러나 나는 이 지옥 훈련을 용케 빠지는 '행운'을 얻게 됐다. 마침 도미를 비롯한 연예대의 악단 멤버들과 함께 해병 홍보 영화를 찍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염치없는 일이지만, 일단 훈련을 빠지게 된 게 너무 좋았다.

나와 도미는 칼날처럼 주름을 세운 해병대 군복을 입고 노래를 불렀다. 내가 봐도 폼 났다. 나는 '낙엽'을, 도미는 자신의 히트곡인 '청포도 사랑'을 불렀다. 이 홍보필름이 영화 상영 직전 '대한뉴스'로 소개된 덕에 '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로 촉발된 내 인기는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신고합니다. 훈련병 최희준 해병대에서 열심히 복무하고 있습니다." 그 짧은 영화가 팬들에게는 확실한 신고식 구실을 한 셈이다.

당시 해병 연예대의 '대장'은 도미였다. 나이나 가수 데뷔 경력으로나 나보다 선배였다. 본명이 오종수인 도미는 육사 2학년을 중퇴한 뒤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이미 50년대 중반에 데뷔해 경쾌한 리듬의 '청포도 사랑'으로 이름을 날렸다.

"파랑새 노래하는 청포도 넝쿨 아래로/어여쁜 아가씨여 손잡고 가잔다/그윽히 풍겨주는 포도 향기/달콤한 첫사랑의 향기/그대와 단둘이서 속삭이면/바람은 산들바람 불어준다네…."

사실 도미는 해병 연예대가 만들어질 때 큰 역할을 했다. 우리 멤버를 구성한 게 그였다. 그런 이유에다 나이도 많아 자연스레 대장이 되었는데,그만큼 통솔력도 뛰어났다. 같은 사병이면서도 대장은 하사관 계급장을 달고 다녔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60년대 초는 가수의 세대 교체기였다. 가수로 나보다 윗세대였던 도미는 제대 후 이런 격변기의 여파로 큰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그와 동시대 인물인 박경원·원방현·명국환 등의 경우도 이와 비슷했다. 도미는 오래 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맹꽁이 타령'의 박재란,'노란 샤쓰의 사나이'의 한명숙 등 장병 위문 공연에 찬조 출연한 단골 여성 가수 가운데 특히 기억에 남는 사람은 이금희다. 이씨는 폴 앵카 노래의 일인자였다.

게다가 '키다리 미스터 김'이라는 히트곡도 있었다. "키다리 미스터 김은/싱겁게 키는 크지만/그래도 미스터 김은/마음씨 그만이에요…."

노래를 시작하면 장병들은 자지러지듯 환호했다. '라이브 무대의 황녀'라는 별명답게 몰입이 대단했다. 한번 공연을 하면 땀으로 흠뻑 젖어 드레스를 짜야 할 정도였다. 위문 공연이나 극장 공연을 가릴 게 없었다.

아무튼 우리는 연병장이건 극장이건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동고동락하며 노래 부르기를 즐겼다. 개성이 뚜렷한 가수들이 우후죽순처럼 머리를 비집고 나오던 '백가쟁명'의 시대였지만, 누구를 눌러야 내가 스타가 된다는 무모한 욕심은 없었다.

비록 가난했지만 마음은 풍요로웠던 시대였다. 맘껏 풍요를 누리면서도 어린 가수 일색의 몰개성적인 노래가 판을 치는 지금 가요계의 풍토와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정리=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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