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참상 만화로 고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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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히로시마 원폭 피해의 참상과 전쟁의 광기에 홀린 사람들의 추악함을 고발한 일본 만화 『맨발의 겐』(아름드리미디어)이 국내에서 10권으로 완간됐다. 2000년 8월 첫권이 나온 지 꼭 2년 만이다.

이 책을 번역해 소개한 재일 한국인2세 김송이(56)씨는 21일 오후 4시 서울 중구문화원에서 열리는 완간 기념회에 참석하기 위해 19일 한국을 찾았다.
그녀는 "청소년들에게 핵무기의 무서움과 전쟁의 참상에 대해 꼭 알려주고 싶었다"는 말로 소감을 대신했다.

金씨가 이 만화를 처음 접한 것은 1980년대 초. 직장에 다니느라 보육원에 맡겨놓았던 아이들로부터 "엄마, 좋은 만화를 빌려왔으니 보세요"라는 권유를 받고서다. 처음엔 "웬 만화책이냐"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金씨는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던 아들이 "인간이라면 읽어야 돼요"라는, 아이답지 않은 말로 채근하자 그날 밤을 새워 읽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알고 보니 이 작품은 전세계 10여개 주요 언어로 번역돼 이미 수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줬다더군요. 그런데 한국어판은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이것을 번역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95년 저자 나카자와 게이지(64)로부터 번역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2권까지 단숨에 번역을 마쳤지만 정작 한국에서 출판할 수가 없었다. '조선'(북한)국적을 가졌고 조총련 계열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28년간 재직해 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金씨에게는 국적보다 이 만화책을 한국어로 빛을 보게 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2000년 1월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도대체 이 작품이 어떻기에 金씨에게 이런 결심을 하게 했을까.

"이 작품은 단순한 반전·반핵 작품이 아닙니다.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있고 시류에 휩쓸려가는 어리석은 인간군상에 대한 따끔한 지적이 있지요. 무엇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일이라면 타협하지 않고 꿋꿋하게 그 길을 가려는 한 소년의 혼이 담긴 이야기입니다."

金씨는 주인공의 이름인 '겐(元)'이란 말에는 인간의 근원이란 뜻이 있으며 '맨발'이란 폐허가 된 대지를 두려워하지 않고 걷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이 만화책이 그동안 소외돼왔던 한국의 원폭 피해자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북한 동포들에게도 이 책을 읽혔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이날 행사에는 히로시마 원폭 당시 실상이 담긴 비디오 상영회도 열린다. 참가자에게는 만화책을 증정한다. 02-322-6012.

정형모 기자

『맨발의 겐』은 이런 작품

만화가 나카자와 게이지는 히로시마 출신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고,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는 기적처럼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원폭이 일으킨 후폭풍으로 아버지와 누나·동생이 지붕에 깔려 불에 타죽는 것을 목도해야 했다. 그 당시의 경험을 생생하게 묘사한 자서전적 작품이 『맨발의 겐』이다.

73년 만화잡지인 『주간 소년 점프』에 연재된 이 작품은 14년 만에 10권으로 완성됐으며 영화(76년)·오페라(81년)·애니메이션(87년) 등으로도 만들어졌다.

나카자와는 배설이 제대로 안돼 몸 안에 독소가 퍼지는 원폭병을 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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