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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융합시대 한국이 갈 길은>'한지붕 多전공'… 시너지효과 극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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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5면

지난달 말 미국 샌디에이고의 셰라턴 호텔에서는 생명과학 연구용 첨단 장비 전시회가 열렸다.

여기서 '디지탈바이오테크놀러지'라는 국내 벤처가 많은 이의 주목을 끌었다. 이 회사가 내놓은 대표 상품은 'C-박스'라는 것. 액체 속에 세포가 몇개나 들어 있는지 하나하나 세는 장치다. 예를 들어 피 속의 백혈구 수를 헤아려 백혈병에 걸렸는지도 검사할 수 있다.

이 제품이 관심을 끈 것은 가격 때문. 똑같은 기능을 하는 미국의 경쟁 회사 제품은 20만달러인데 C-박스는 5만달러선이다. 이 회사 대표인 서울대 장준근(전기컴퓨터공학부) 교수는 "제품 구입 문의뿐 아니라 투자 의사를 밝혀온 외국 기관도 있었다"고 말했다.

디지탈바이오테크놀러지가 국제적인 관심을 끌 정도로 경쟁력 있는 제품을 만들어 낸 비결은 바로 기술 융합에 있다. C-박스의 핵심은 여러 가지 검사가 작은 플라스틱 칩 안에서 모두 이뤄지도록 한 이른바 바이오 멤스(Bio-MEMS) 기술. 여기에는 생명공학뿐 아니라 광학·유체역학·화학·전자공학 기술까지 모두 어우러져 있다.

이런 C-박스를 개발한 디지탈바이오테크놀러지 연구원들의 전공도 각양각색이다. 28명 직원 중 23명이 연구원이고, 이중 일곱명이 박사인데 모두 전공이 다르다. 의공학·분석화학·제어계측공학·병리학·화학공학·광학·미세기계공학 등이다. 내년 초에는 유체역학을 전공한 박사 한명이 합류하게 돼 있다.

회사 안의 실험실도 반도체 회사 같은 청정실을 비롯해 미세가공실·전기화학연구실·생물학 실험실 등 없는 게 없다. 회사 전체가 '종합기술연구소'의 축소판쯤 되는 셈이다.

연구원 개개인마다 분야는 다르지만 누군가 빠지면 일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핵심 칩을 설계할 때 세포의 어떤 특징을 이용해야 하는지(생물), 검사에 적합한 화학물질은 무엇인지(화학), 검사 결과에서 어떤 신호가 나오고 이를 어떻게 컴퓨터로 분석할 것인지(전자) 등을 각각 관련 전문가들이 모여 논의해야 한다.

제품 개발의 단계가 모두 이런 식이어서 이번 여름 휴가도 아예 지난 5일부터 1주일 동안 회사문을 닫고 전 직원이 한꺼번에 갔다 왔다. 그야말로 이런저런 학문과 기술이 완전히 하나로 융합된 회사인 것이다.

사실 기술 융합은 과거에도 있었다. 여객기만 해도 비행기가 날기 위한 유체역학, 각종 첨단 장비에 필요한 전자공학, 편안한 기내 설계를 위한 인체공학 등이 어우러진 제품이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과거에는 제품이 기술 융합의 산물이더라도 부품 하나에는 한 분야의 기술만 적용됐는데, 지금은 부품마저 기술 융합 없이는 만들 수 없다는 점이다.

또한 첨단 기술을 이용하는 고객들의 다양한 요구도 기술 융합을 부채질하고 있다.

장교수에 따르면 지난달 전시회에서도 C-박스 자체에 대한 문의 뿐 아니라 "그런 기술을 갖고 있다면 이런 제품도 만들어 줄 수 있느냐"는 요청이 많았다는 것이다. 다른 제품을 만들려면 또 다른 기술 융합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장교수는 "첨단 기업이라면 가진 기술을 바탕으로 제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만들까를 정한 뒤 필요한 기술을 모아야 하는 시대"라며 "그렇게 만든 제품들이 기업에 훨씬 높은 부가가치를 가져다 준다"고 말했다.

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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