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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98>제103화人生은나그네길:2."서울대에 가수 떴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1958년 일이다. 사회 전체적으로 전쟁의 상흔(傷痕)이 한창 아물기 시작하던 무렵이다. 내가 다니던 서울대도 환한 분위기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학생들은 생기가 넘쳤다.

그해 가을 총학생위원회 주최로 열린 '서울대 놀이 자랑 대회'는 그런 변화를 단적으로 반영했다. 전쟁 뒤 처음으로 단과대 구분없이 하나로 어울릴 수 있는 여유를 찾은 것이다.

나는 선뜻 이 축제에 도전장을 냈다. 비록 겨루기는 아니었지만, 축제의 주연(主演)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이 생겼다. 서울대 문리대 마로니에 광장에서 대회가 열렸다. 현재 내가 감사로 일하고 있는 한국문예진흥원 본관 건물 터가 그 자리다.

당시 4학년이던 나는 가야금을 하던 동료 황병기(이화여대 명예교수)와 법대 대표로 출전했다. 황씨는 나보다 1년 늦게 입학한 후배였지만, 그 때는 같은 학년이었다. 고시 공부와 탈장(脫腸)으로 인해 내가 바로 전해 1년을 휴학한 탓이었다.

"장기라…."

순간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재주가 무엇인가를 놓고 고민했다. 황병기는 자타가 공인하는 확실한 '무기'가 있었는데, 나는 그게 시원치 않아 보였다. 궁하면 통하는 걸까.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구들이 칭찬해 마지않던 노래를 떠올렸다.

"그래, 팝송으로 승부를 걸자."

나는 경복고를 다니던 시절부터 미군방송(AFKN)을 즐겨 들으며 최신 팝송을 거의 외우다시피했다. 신곡이 나오는 족족 가사를 적어다가 학교의 칠판에 써놓고 친구들을 가르치길 좋아했다. 음악 선생 노릇을 한 것이다. 당시엔 특히 '하이눈''오케이 목장의 결투''하녀' 등의 영화음악이 꽤 인기가 있었다. 가수로는 프랭크 시내트라는 물론 팻 분·냇 킹 콜 등이 활발히 소개됐다.

고교 시절엔 미군방송이 노래의 보물창고였다면, 대학 시절은 학교 근처 '별장다방'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지금도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 '학림다방'과 쌍벽을 이루는 우리들의 명소였다. 서울대 문리대생으로 나중에 요절 가수 배호의 노랫말을 많이 지었던 작사가 전우 등이 이곳에서 어울리던 멤버였다.

우리는 한 면에 두어곡이 들어 있는 45회전짜리 일명 '도너츠판'을 들으며 서양의 최신곡을 접했다. 이 다방에는 '미스 김'이라는 아가씨가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비상한 기억력에 감탄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외상값을 일일이 기억하고 있다가 "돈 언제 갚으실래요"라며 따지는 통에 학생들은 혼쭐이 나기가 일쑤였다.

아무튼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나 그런대로 통했던 내 노래 실력이 이제 대중 앞에 선보일 기회가 찾아왔다. 나는 당시 유행하던 노래 가운데 허스키한 저음의 내 음색에 가장 잘 맞는 노래 두 곡을 골랐다. 팻분의 '아일 비 홈'과 일명 '고엽(枯葉)'으로 알려진 냇 킹 콜의'오텀 리브스'였다.

비록 아마추어들의 잔치였지만 축제의 반주자는 1급 중의 1급이었다. 가요계를 주름잡던 김광수 악단이 반주를 맡았다. 이 악단은 특히 탱고 연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유명했다. 단장인 김씨는 내 노래 '광복 20년'과 '엄마야 누나야'를 작곡한 바이올린 주자였다.

가설(假設)이긴 하지만, 처음 무대다운 무대에서 유명악단과 호흡을 맞추려니 꽤 긴장이 됐다. 초반 한두 소절 음정이 불안했으나 이내 흥분을 가라앉히고 '아일 비 홈'을 그럴 듯하게 흉내냈다.

"앙코르. 브라보…." 여기저기에서 박수와 함께 나를 연호(呼)하는 소리가 들렸다.

"잘 하긴 한 건가." 깊게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나는 고조된 분위기에 휘말려 넉살좋게 '고엽'을 불렀다. 언젠가 황병기가 이때 내 노래 실력에 대해 괜찮은 평을 해줘 나는 그걸 '정답'으로 알고 살아왔다.

아무래도 다 좋았다. 그러나 이 우연한 무대가 내 인생의 궤도를 송두리째 바꾸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일 줄이야. 어느새 "서울법대생 최성준(당시 본명)이 끝내주게 노래를 잘 한다"는 소문은 발이 달려 상아탑의 담장을 훌쩍 뛰어 넘고 있었다.

정리=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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