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좋은 아빠는 숨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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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이완주(41·회사원)씨는 몇 년 전만 해도 육아나 자녀 교육 등에 소소하게 관여하는 남자들을 보면 "남자 망신 다 시킨다"며 손가락질을 하곤 했다. 하지만 요즘엔 조용히 입을 다문다.

"아내는 늘 나를 다른 집 아빠들과 비교하며 바가지를 긁습니다. 나름대로 노력하지만 그들을 따라갈 수 없어 고통을 느낍니다."

李씨처럼 '좋은 아빠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아버지가 늘고 있다.아버지의 역할에 대한 기대 수준이 점점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 '좋은 아빠'신드롬

1990년대 이후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www.fathers.or.kr),'딸 사랑 아버지 모임'(02-2273-9535)등의 단체가 '좋은 아버지 되기 운동'을 주도해왔다.

최근에는 보통 아빠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인터넷 사이트 다음(www.daum.net)의 '좋은 아빠'카페 회원수는 2천명을 넘었다. 대형 할인매장·수퍼에서는 저녁·주말마다 아빠가 가족을 이끌고 쇼핑하는 풍경이 펼쳐진다.백화점의 아동복 매장에도 아빠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인터넷의 육아 포털 사이트에는 '아빠의 육아일기'코너가 따로 마련되곤 한다.

일부 유치원에서는 '학부모 참관 수업'을 '엄마 참관 수업'과 '아빠 참관 수업'으로 분리해 아빠들의 참여 기회를 열어두었다. 아빠가 쓴 육아·교육 서적도 속속 출간되고 있다. 최근에는 아예 『좋은 아빠』라는 제목의 계간지가 창간되기도 했다.

'아버지의 전화'(02-2208-0660) 정송(48)대표는 "대규모 구조조정·환란(換亂)을 경험하면서 직장이 미래의 행복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남자들이 가족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나쁜 아빠(?)'는 왕따

하지만 '집으로'향하는 대세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빠들은 주변의 핀잔에 시달려야 한다.

23개월 된 딸을 둔 박건한(30·회사원)씨는 "요즘엔 친구를 만나도 가족 단위로 모인다"며 "남자들끼리만 술을 마시자고 요구하는 친구는 은근히 따돌림당한다"고 귀띔했다.

이주영(33·회사원)씨는 일요일이 더 괴롭다. 피곤해 쉬고 싶은데 아내와 아이가 나들이를 가자고 독촉하기 때문. 그는 최근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이제는 아예 한쪽 귀로 흘려버린다'며 고충을 털어놨다가 되레 '가족의 요구를 즐겁게 받아들이라'는 다른 아빠들의 충고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가족답사모임 '아빠와 추억 만들기'의 여행 참여 가족 중 80%는 아내가 신청한 뒤 남편을 끌고 온다. 이 모임 권오진(42)단장은 "좋은 아빠 콤플렉스나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은 그나마 좋은 아빠 축에 든다"며 "자녀에게 무관심하고 가족의 의견을 무시하는 아빠가 아직 많다"고 지적했다.

# 수퍼 아빠 콤플렉스

좋은 아빠라고 해서 스트레스가 없는 건 아니다. 두 아들을 둔 김익태(37·회사원)씨는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아빠'라는 말을 듣는 편이다.놀아주는 건 기본. 가끔 아이들의 학교·유치원에도 들른다. 하지만 주말이 다가오면 고민에 빠진다. 아이들을 데리고 집 밖에 나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장이라도 보러 가야 안심이 된다.

잡지 『좋은 아빠』발행인 최진섭(41)씨는 "가부장적인 습관이 몸에 밴 채로 자라난 남자들이 전혀 새로운 아빠의 모습을 갖추려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따르는 진통"이라고 말했다.

'사랑하는 이에게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이 광고 문구처럼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서는 '부자 아빠'가 돼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도 벗기 힘든 큰 짐이다.

김수철(33·한나라당 홍보실)씨는 "아이들을 보면 항상 즐겁지만 경제력의 한계 때문에 더 많은 걸 경험하게 해줄 수 없어 마음이 무겁다"고 말했다. 좋은 아빠는 가사일을 분담하고 자녀에게 잘 하며 돈도 잘 벌어오는 히딩크식 멀티플레이어가 돼야 하는가.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 양정자 원장은 "모든 이에게 수퍼맨이 되길 요구하는 시대인 건 분명하다"며 "아내도 힘든 남편을 위해 가끔 혼자만의 시간을 주고 격려해 주는 등 햇볕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충고했다.

# 나는 정말 좋은 아빠?

박우혁(39·회사원)씨의 휴대전화 액정 화면에는 '좋은 아빠, 좋은 남편 되자'는 문구가 찍혀 있다. 그는 "노력은 하지만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아빠가 진짜 좋은 아빠인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진짜 좋은 아버지는 어떤 모습일까. 일부 학자들은 다른 자녀들도 사랑하는 '사회적 아버지'를 모범적인 아버지상으로 제시한다. 독립투사·지사 등 대의명분을 위해 몸을 던지던 정의롭고 용감한 아버지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아버지 상실 시대'의 빈 자리를 채우자는 것이다.

한국남성학연구회장 정채기 교수는 날개가 꺾인 아버지의 모습을 감부간모(甘父干母·느끼할 정도로 달고 무른 아빠와 사사건건 간섭하는 엄마)라고 설명한다.

"요즘의 상당수 아버지는 집에선 한없이 좋은 아빠지만 밖에서는 원조 교제를 하고 비리를 저지르는 등 비굴하지요. 가족만 생각하지 말고 소외층, 다른 사람의 아들 딸도 생각하면서 이런 모순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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