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View 정명훈의 ‘음식 교향곡‘] 내 손으로 만드는 ‘정명훈표 디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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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날 요리를 위해 집에서 미리 만든 토마토 소스를 가져갔다. 또 다른 재료는 꽃게였다. 게 요리는 소스가 많아야 한다. 그런데 재료를 억지로 늘리다 보니 소스는 그대로고 게만 많아졌다. 맛을 기대하지 못할 수밖에. 다행히 이날 연주도 좋았고 연주자들도 낙천적인 이들이었기에 망정이지, 내내 사람들의 눈총을 받을 뻔했다.

연주자들은 공연이 끝나고 뭘 먹을까,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나는 지독히도 빨리 도망치는 사람이다. 그날 식사는 아주 특별한 경우였다. 원래는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으면 공연 전에 대기실로 와달라고 부탁한다. 연주가 끝나면 차로 직행해 집에 달려간다.

달리는 차 안에서 집에 전화를 건다. “무슨 재료 있어?” 기다리던 아내가 답한다. “오징어 아주 좋은 게 있어요.” 얼마 전 서울시향과의 서울 공연이 끝났을 때는 냉장고에 싱싱한 오징어가 있었다. 여기에 우리 집 상비 재료인 토마토 소스만 있으면 끝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물을 끓인다. 그리고 파스타를 삶는다. 그동안 다른 모든 게 준비돼야 한다. 물은 5~6분 끓이고, 면은 9분 정도 삶는 게 보통이다. 이렇게 모든 요리는 15분 안에 완성돼야 한다. 오래 걸리는 요리를 기다렸다 먹는 건 체질에 맞지 않는다.

오징어와 함께 파스타에 해산물을 넣어도 좋지만, 미리 준비해 놓으면 신선도가 떨어진다. 이 때문에 미리 절여놓은 정어리를 쓴다. 정어리를 이탈리아 식으로 올리브 기름에 절여놓은 앤초비는 내 요리의 단골손님이다. 샐러드에 넣어서도 먹고, 해산물 소스를 할 때마다 쓴다. 단, 조개로 소스를 만들 때는 너무 짜지기 때문에 생략한다.

물이 끓는 동안 오징어를 얇게 썰어 올리브 기름에 볶는다. 나이가 들면서 살찌는 것을 걱정하게 돼 해산물은 많이 넣고 파스타는 조금만 넣는다. 오징어에 화이트 와인을 조금 넣고 와인이 거의 없어질 때쯤 토마토 소스를 넣어 함께 볶는다. 그 다음에는 파슬리만 있으면 완벽한 ‘공연 후식’이 된다. 이대로라면 예술의전당에서 오후 10시 공연을 끝나고, 구기동 집에 도착해 11시30분쯤 식사를 끝낼 수 있다.

음악회가 끝난 후 이탈리아 음식을 주로 먹는 이유는 그 단순함 때문이다. 신선한 재료를 손에 넣고 그 조합을 잘 맞추기만 하면 된다. 파스타와 올리브유, 토마토·소금·파슬리만 가지고도 대부분의 요리를 잘 할 수 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탈리안 레스토랑도 아주 소박한 스타일로 간단한 요리를 내놓는 곳이다. 피렌체 근처의 휴양도시인 산 빈센초에 있는 ‘감베로 로소’라는 곳은 레스토랑이라기보다는 한국의 ‘가정식 백반’ 같은 트라토리아(trattoria)에 가깝다. 하지만 셰프만큼은 최고다. 이탈리아 미식가협회에서 이 식당 셰프인 피에르 안젤리니를 최고의 셰프로 다섯 번이나 뽑았다. 나는 그에게 이탈리아의 기본 요리를 배운 적이 있다. 하루 날을 잡아서 파스타와 수프 등을 배웠다. 그의 간단한 조언이 어딘가 밋밋했던 내 요리에 완벽한 맛을 가져다 줬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칙피(chickpea·병아리콩) 수프다. 우선 칙피를 미리 불려놓고 약한 불에 삶아 갈고 그 위에 새우를 올려 만든다. 이외에는 베이킹 소다, 마늘, 소금 정도만 있으면 된다. 로즈메리도 있으면 향을 내는 데에 좋다. 간단하지만 건강에도 좋고 맛도 좋다.

만족스러운 식사에 꼭 다른 사람의 도움과 거창한 재료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제일 만족할 수 있는 건 자신이 만드는 음식이다. 그래서 남자들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요리를 많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공연 후 먹는 요리들은 다 직접 만들 수 있는 것들이다. 몇 시간 동안 무대 위의 피 말리는 긴장감과 싸운 후 내 손으로, 마음대로 해 먹는 요리의 맛이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고급 요리를 배운 적도 없고 찾지도 않는 내가 공연 후 항상 재빠르게 우리 집 부엌으로 사라지는 이유다. 물론 지난여름처럼 실패도 하지만, 그 기분만큼은 최고다. 올여름 ‘7인의 음악회’ 후엔 지난해보다 성공적인 것을 만들어 먹을 수 있을까? 그 상상에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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