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성직자 부정부패 못참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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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이란에서 반(反)정부 시위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 9일 수도 테헤란에선 수천명의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독재정치 타도를 외치며 민주화 개혁을 보수파 이슬람 성직자들에게 요구했다.같은 날 남부 이스파한에서도 수만명이 참가한 대규모 반정부 집회가 열렸다.

집회에는 보수파의 친위세력인 혁명수비대와 경찰 일부도 가담했다. 1주일 뒤에는 1만5천여명의 노동자들이 테헤란 시내 사회복지부 청사 앞에서 임금 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런 가운데 최고위 이슬람 성직자 중 한 명인 이맘 잘랄루딘 타헤른이 최근 항의 표시로 사임했다. 타헤른은 사퇴 성명에서 권력을 잡은 이슬람 성직자들을 '마피아'라고 부르면서 "국민들은 실업과 인플레이션,빈부격차 확대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는데 권력층은 부정부패, 언론 탄압,폭력 행사를 일삼고 있다"고 비난했다. '신이 지배하는 나라' 이란에서 전례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1979년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이슬람혁명 지도자 루홀라 호메이니는 이슬람 율법학자가 통치하는 나라를 표방하고 최고지도자가 됐다. 최고지도자는 군 최고통수권을 비롯해 대통령 인준권과 대법원장 임명권 등 절대권력을 행사한다.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도 최고지도자 밑에 있으며,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을 해임할 수도 있다. 현재 최고지도자인 알리 하메네이는 89년 호메이니 사망으로 자리를 승계했다.

당연히 이란에선 보수파 이슬람 성직자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 법원·군·경찰·정보기관·방송을 장악하고 반대파를 탄압한다. 국가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1백여개에 달하는 종교재단인 분야드로 석유에서 농장·일반회사·대학에 이르기까지 각종 이권에 개입해 재산을 불리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민의 불만은 점점 커지고 있다. 서민들은 식량과 일자리, 기업인들은 민영화와 규제 철폐, 지식인과 젊은층, 여성들은 더 많은 자유를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특히 6천5백만 인구의 65%를 차지하는 25세 이하 청년층에서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드높다. 97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슬람 성직자들 가운데 중간 서열에 속했던 개혁파 모하마드 하타미가 70%가 넘는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 것도 청년층의 이러한 열망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하타미의 개혁은 보수파의 견제로 번번이 좌절됐다. 이 때문에 하타미는 지난해 대통령 선거 출마 포기를 고려하기도 했다. 결국 하타미는 압도적 지지로 재선에 성공했지만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현재 이란 정치는 보수-개혁파가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달 중순 개혁파 가운데 최대 세력인 이슬람참여전선은 보수파가 개혁을 계속 방해하면 정부와 의회에서 철수하겠다고 위협하고 나섰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지난 12일 '미국의 소리(VOA)'방송을 통해 자유·인권·기회를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을 이란 정부에 촉구하면서 "이란이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는 데 미국 이상의 '친구'는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중동문제 전문가들은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미국이 개혁파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새로운 민주세력과 제휴를 모색하는 것으로 분석한다.

그러나 미국의 노골적 개입은 보수파의 입장을 강화하고 개혁파의 입지를 좁힘으로써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정우량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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