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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불타는 집’에서 벗어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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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주변을 살펴보라. 어디가 불난 곳이고 어디가 안전한 곳인가? 또 어느 곳이 불이 날 가능성이 많은가? 개인의 삶 속에도 불날 곳이 무수할 것이다. 시험을 준비하지 않은 학생은 성적표에 불이 날 것이고, 젊어서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늘그막에 고된 노역이라는 불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미리미리 화재 예방을 잘한 사람은 늘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북한이 ‘불바다’를 운운하며 엄포를 놓을 때면 화택의 비유를 생각한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바로 불타는 집이 아니겠는가. 불타는 집의 비유는 현재진행형이다. 천안함 격침 사건이 그랬고, 그 이전의 연평해전이 그랬다. 60년 전에도 400년 전에도 그랬다. 화기(火氣)가 불을 뿜는 그 순간 우리의 안보는 불타는 집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불타는 집에 살고 있다. 더 큰 불이 우리의 몸을 태우기 전에 철저히 예방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절박한 현실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절박감을 체감하지 못하고 이내 ‘놀이’에 빠져 버린다. 철없는 아이들처럼.

우리 사회는 극단과 극단의 대립으로 불타고 있다.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6·2 지방선거 이후 본격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특히 교육현장에서의 갈등은 매우 심각하게 치닫고 있다. 4대 강이나 세종시 등 국책사업을 두고 대립하는 양상도 극단과 극단이다.

민주주의는 자유로운 사상과 다양한 의견의 총결이다. 화해와 통합이 없으면 민주주의의 기본은 무너진다. 극단과 극단을 제어하고 양보하고 통제할 수 있을 때 다양한 주장이 발전적 에너지로 전환된다. 중재 기능은 없고 대립만 있는데 어찌 발전적인 대안이 나오겠는가.

지금 우리 사회는 ‘중재의 부재(不在)’로 인해 갈등과 대립이 증폭·심화되고 있을 뿐이다. 대립과 극단이 끝내 화해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그 결과는 불타는 집에서 함께 불구덩이를 맞이하는 것이다. 나라 안의 대립과 분열이 자라면 어느 순간부터 국가 안위의 문제로 확대된다. 작은 불길이 큰 불길이 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지금의 대립과 갈등이란 어찌 보면 작은 불길이다. 이 작은 불길이 발전적 화해로 이어져 국민화합과 국가발전이라는 결과로 승화되지 않으면 금방 큰 불길로 바뀌어 버린다.

작은 불길 속에 도사린 또 다른 불길들이 문제다. 화합보다는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집착과 오만이 군데군데 숨어 있어 화해와 협력의 코드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이다. 화합과 국가 안보라는 코드는 부부의 금실(琴瑟)과도 같은 것이다. 더러 토닥거리며 다투더라도 집안의 중대사 앞에서는 힘을 합치는 것이 정상적인 부부다. 떡 한 조각을 먹기 위해 집 안에 도둑이 들어 재물을 훔치고 아내를 겁탈해도 입을 떼지 않은 어리석은 남편의 이야기가 우리의 현실이어서는 안 된다.

지금 국가안보와 사회통합이라는 중요한 과제 앞에서 ‘불타는 집’의 비유를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안보 앞에서는 누구도 입을 열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안보논리가 민주주의의 다양한 의견을 압도한다는 주장도 아니다. 다만, 양보와 화해의 시점을 간파하는 지혜와 중재(仲裁)의 묘를 살릴 수 있는 세력의 등장이 필요할 뿐이다. 이러한 장치 없이는 통합이 없고, 통합의 부재에서는 극단적인 대립을 풀 길도 없기 때문이다.

『법화경』에서 부자는 불타는 집 안의 아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너희가 좋아하는 장난감이 많이 있으니 얼른 나오라”고 소리친다.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은 무사히 불난 집에서 빠져나온다. 대한민국의 안보와 행복이라는 장난감은 어디 있을까.

‘불타는 집’에서 벗어나려면 이 물음의 정답을 찾아야 한다.

김법혜 스님 민족통일불교중앙협의회 의장·민주평통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