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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하게 만나 어느새 친구 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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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이상은 기자

기자 빼고 모두 영어권 … 낯설은 동행의 시작

1 무용수들이 부주키 음악에 맞춰 그리스 전통춤을 추고 있다. 2 관광객에게 인기인 가죽샌들은 고대그리스 때부터 존재했던 것. 3 일행이 들고 건배하는 그리스의 전통술 우조. 작은 잔이라고 얕보다간 큰 코 다친다.

워싱턴DC에서 온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소녀, 플로리다에 사는 30대 초반의 교감 선생님, 밴쿠버에서 온 정신상담사. 미국· 캐나다· 호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온 사람들이 내 일행이었다. 나는 유라시아 대륙의 대표였다. 영어권 사람들과 섞여 영국인 애덤(28)을 가이드로 해서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영어 설명을 들으며 여행을 해야 했다. 처음 간 곳은 신타그마 광장과 플라카 시장. 어제 왔던 곳을 다시 한 번 찬찬히 구경했다. 다시 보니 시장에서 파는 1유로짜리 마그네틱조차 섬세하게 조각되고 알록달록 색칠돼 있었다. 시장에서 인기 있는 토산품은 올리브 열매 절임, 올리브 오일 비누, 가죽 샌들, 그리스 국기가 그려진 티셔츠 등이었다. 모두가 쇼핑 삼매경에 빠져있다 보니 어느덧 저녁이 됐다. 호객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피해가며 미리 예약해 놓은 타베르나로 향했다. 그리스 관광지의 식당에선 호객 행위를 적극적으로 한다. 재미있는 건 호객꾼이 대부분 할아버지란 것이다. 그리스 할아버지들은 친근한 미소와 함께 서양인에겐 “헬로”를 동양인에겐 “곤니치와”나 “니하오”를 외친다.

올리브열매와 페타치즈가 특징인 그리스 샐러드.

오이·토마토 등을 썰어 넣은 요거트 차지키부터 올리브 열매와 페타치즈(그리스의 양젖 치즈)로 만든 샐러드, 고기를 그릴에 구워 기름기를 쭉 뺀 꼬치 요리 수블라키까지 그리스인들이 즐겨 먹는 전통 음식으로 식사를 했다. 음식은 맛있었고 분위기는 어색했다. 그때, 갑자기 한쪽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식당 가운데로 무용수들이 뛰어나온 것이었다. 그리스 전통 복장을 한 무용수 네 명은, 노인 악단의 부주키(만돌린과 비슷한 그리스 악기) 연주에 맞춰 전통춤을 선보였다. 주로 공중 발차기로 이뤄진 격정적인 춤이었다. 춤을 추는 내내 무용수들은 “오빠!”라고 외쳤다. 알고 보니 정확한 발음은 ‘오파(opa)’로 환호할 때 쓰는 그리스 감탄사였다. 한국말로 오빠가 무슨 뜻인지를 알려주며 컨티키 일행과 말문을 트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재미있어 했고 내친 김에 ‘누나’까지 알려주며 분위기를 띄웠다. 그러나 한편으론 걱정이 밀려왔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유일한 사람으로서, 앞으로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하는.

델피에서 술로 벽 허물어 … 고마운 디오니소스여

이번 여행은 처음 4일은 육지 여행, 나중 4일은 크루즈 여행이었다. 처음 4일 동안은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 델피의 아폴론 신전 등을 둘러봤다. 유적들은 대부분 보수 공사 중이긴 했지만 듣던 대로 화려하고 웅장했다. 관광객도 많았다. 하지만 새벽 6시에 일어나 버스로 이동하는 여행일정의 피곤함 때문인지 감탄사는 나오지 않았다.

3일째의 밤, 아테네와 올림피아를 거쳐 델피로 향했다. 그때까지도 일행과는 서먹했다. 일행은 나라별로 자연스레 그룹이 형성돼 있었다. 유일한 한국인으로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그들만 아는 ‘알아들을 수 없는 농담’이었다. 그러나 어렵게 떠나 온 배낭여행. 달리는 버스 속에서 ‘어떻게 해야 이들과 친구가 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가이드 애덤이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델피로 가는 동안 버스 안에서 간단한 자기 소개를 하겠습니다.” 순간 손에 땀이 찼다. 좋아하는 유명 인사와 그 이유, 현재 데이트 하는 사람이 있는지, 평생을 살아오며 가장 당황스러웠던 순간은 언제였는지, 마지막으로 만들어먹은 요리는 무엇인지 등등을 다 이야기해야 했다. 마침내 순서가 왔다. 마이크를 잡고 애써 큰 목소리로 말했다. “영어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닌 사람이 나 외에는 한 명도 없어서 당황했다. 마지막으로 만들어 먹은 음식은 비빔국수다.”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 “좋아하는 유명 인사는 힙합 가수 플로라이다. 그의 톡 튀어나온 배가 귀엽기 때문”이라는 말에 일행은 박장대소를 했다. 그리고 자꾸만 “정말이냐”고 물어왔다.

우조는 소주처럼 투명하지만 물을 부으면 우유처럼 뿌옇게 변한다.

델피에 도착해 우리는 작은 타베르나에 들렀다. 그곳에서 함께 그리스 전통술인 ‘우조’를 마셨다. 우조는 소주처럼 투명하고, 도수는 40도 이상이다. 독해서 원액으론 못 마신다. 물이나 얼음을 타 마시는데, 얼음을 타는 순간 투명하던 상태에서 뿌옇게 변한다. 잔이 소주잔만 해서인지 모두가 ‘원샷’하는 분위기. 호주에서 온 제임스(24)가 “한국인은 술을 잘 마시지 않느냐”며 원샷을 권했다. 얼떨결에 원샷한 우조 때문에 취기가 점점 올랐다. 덕분에 영어울렁증은 말끔히 사라졌다. 갑자기 말이 많아지자 모두들 재미있어 했다. 다들 조금씩 취한 상태로 델피 구경에 나섰다. 델피는 아폴론 신전과 그 주변의 기념품가게를 빼면 정말 작고 소박한 마을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마을에도 ‘클럽’은 있었다. 클럽 문화의 시초는 고대 그리스였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고대 그리스인들은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숭배하기 위해 밤새 술을 마시며 함께 춤을 추고 즐겼다고 한다. 30여 명의 다국적 젊은이들은 그날 밤, ‘고대 그리스인의 후예’가 됐다. 델피의 작은 클럽에 모두 함께 갔다. 국적을 막론하고 클럽 안에선 다 똑같았다. ‘젊음’자체였다. 서먹함은 그날로 사라졌다. 남아공에서 온 카르멘(21)은 춤추는 내내 “오빠”와 “누나”를 외쳐댔다. 새벽 다섯 시, 우리는 가이드 애덤의 손에 이끌려 숙소로 향했다.

미코노스의 흰색·파란색 조화, 터줏대감 펠리컨 …

갑자기 나타나 관광객들을 놀랜 펠리컨 ‘페드로’.

4일째 되는 날, 일행은 둘로 갈라졌다. 4일짜리 크루즈에 참가할 사람들과 7일짜리 크루즈에 참가할 사람들이다. 4일짜리 크루즈를 신청한 사람은 10명. 지난밤의 아쉬움은 뒤로 한 채 20여 명의 친구들과 헤어졌다. 밴쿠버에서 온 정신상담사 리아(29)는 자신의 발가락에 있던 발가락반지를 주고 갔다. 지난 밤 “발가락용 반지는 처음 봤는데 예쁘다”고 무심코 했던 말을 기억해준 것이었다.

우리가 탄 배는 ‘아쿠아마린 호’. 흔히 생각하는 호화 크루즈는 아니다. 방이나 화장실 모두 비좁았다. 하지만 그리스 여행의 하이라이트, 미코노스와 산토리니 섬이 기다리고 있어서 마음은 들떴다. 배에 오르기 전, 남은 4일을 함께 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다. 컨티키를 통해 여행하던 다른 그룹과 합류한 것이다. 20명 정도였으며 역시 모두 영어권에서 온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이들이었다.

‘아쿠아마린’호엔 300여 명이 탑승했다. 미코노스를 향해 가는 배 안에서 그들은 저마다 여유를 즐겼다. 풀장 주변에 누워 햇빛 아래에서 책을 읽기도 하고 그리스 춤 강습을 받기도 했다. 그런 광경들을 구경하는 사이, 온통 하얀 섬이 점점 다가왔다. 미코노스였다. ‘어쩜 이렇게 다 흰색일 수 있는지’ 신기했다. 미코노스와 산토리니는 모두 강한 햇빛을 반사하기 위해 집을 흰색으로 칠하기 때문이다. 미코노스의 랜드마크인 다섯 개의 곡물 풍차 앞에서 모두들 ‘인증 샷’ 한 장씩을 찍고, 골목길 구경을 시작했다. 책에서 본 대로 정말 대문은 새파랬고 길바닥은 바둑돌 무늬였다. 빨래조차 색을 맞춰 너는지 파란색이었다. 빨간색, 주황색 등 원색 옷을 파는 가게들이 온통 흰색과 파란색인 풍경에 포인트를 주고 있었다. 배가 고파진 우리는 관광객으로 꽉 찬 좁은 골목을 뚫으며 타베르나로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일행 중 한명인 배스(26)가 괴성을 질렀다. “악, 저 새한테 맞았어!” 펠리컨이 등장한 것이었다. 펠리컨은 미코노스의 터줏대감 새다. 1954년 1대 펠리컨이 미코노스에 자리를 잡았고 지금 있는 펠리컨은 3대째다. 미코노스 사람들은 그 펠리컨을 “페드로”라 불렀다. 갑자기 나타난 페드로는 뒤뚱거리며 온 골목을 뛰어다녔다. 펠리컨에 놀란 배스를 진정시키고 타베르나에 들어갔다. ‘섬에 왔으니 그리스식 해산물 요리를 먹자’는 배스의 의견에 모두들 찬성했다. 그 해산물 요리는 ‘칼라마리’, 다름 아닌 오징어 튀김이었다. ‘한국 길거리에서 먹던 것과는 다를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더 잘게 썰었다는 점만 빼면 똑같았다. 지중해 레스토랑에서 ‘한국의 길거리 맛’을 만났지만, 실망스럽기보단 반가웠다.

비틀비틀 당나귀 타고 산토리니 쪽빛바다 보고

5손에 땀을 쥐게 한, 산토리니에서의 나귀 체험. 6 크루즈 승객들이 춤을 배우고 있다.

어느덧 일정은 산토리니 하나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산토리니에선 나귀 체험을 할 수 있다. 산토리니에 정박하는 배는 보통 ‘올드 포트’라는 항구를 이용한다. 그 올드 포트는 산토리니 중심부인 피라 마을의 절벽 아래 있는데, 피라 마을을 구경하고 올드 포트로 돌아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곤돌라를 타거나 당나귀를 타는 것. 컨티키 일행은 한 명도 빠짐없이 당나귀를 선택했다. 그러나 당나귀는 반전을 안겨줬다. 만화 캐릭터처럼 작고 귀여운 당나귀를 상상했지만, 실제론 크고 평범한 말 같았다. 분뇨 냄새도 지독했다. 게다가 자꾸만 비틀거리는 바람에 고삐를 꼭 붙든 채 당나귀의 머리만 쳐다봐야 했다. 나귀가 절벽의 588개 계단을 반쯤 내려갔을 때에야 ‘비틀거리긴 해도 쓰러지진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비로소 고개를 들어 절벽 아래를 내려다 봤다. 산토리니의 새파란 바다와 울긋불긋한 화산섬이 한눈에 들어왔다. 분뇨 냄새까지도 운치 있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첫날의 어색함 어디 가고 헤어진다는 아쉬움만 …

배로 돌아와 마지막 밤을 보냈다. 30여 명의 젊은이들은 새벽까지 잠들지 않았다. 일부는 개별적으로 유럽 여행을 더 하고 갈 계획이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버스로 갈아타고 다 같이 아테네 신타그마 광장으로 돌아왔다. 어색한 첫 만남이 시작된 곳이었다. 신타그마 광장에서 헤어지며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서로의 페이스북(소셜 네트워크 사이트) 주소를 주고받았다.

미케네에 있는 아가멤논의 묘. 벽에 말을 하면 소리가 되돌아온다고 해, 귀를 대고 확인 중이다. 결국 소리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다국적 배낭여행이란?

말 그대로 전 세계 사람들이 한데 모여 같이 다니는 단체 배낭여행이다. 컨티키·탑텍·트렉 아메리카 등이 대표적인 여행사다. 이번에 체험한 컨티키(www.contiki.co.kr)의 경우, 만 18~35세 사이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다. 혼자선 가기 어려운 곳도 쉽게 갈 수 있고 국적을 초월한 우정도 쌓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영어권에서 온 참가자들이 많으므로, 영어가 불가능하다면 힘들 수 있다. 기본적인 영어회화 공부와, 외국 친구들에게 선물할 한국 기념품을 준비해가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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