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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직의 虛實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전두환(全斗煥)정권 막바지에 있었던 일화 한 토막이다. 정치적 위기에 몰려 있던 당시의 정권은 역대 정권이 흔히 그랬던 것처럼 전면 개각이라는 방편을 취했다. 개각 발표가 있던 날 아침, 기자들이 국무총리 피(被)지명자의 집을 찾았다.

인터뷰에서 피지명자가 기자들에게 물었다."다른 장관들에는 누가 임명되었는가." 그때의 헌법에서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국무위원은 국무총리가 제청해 대통령이 임명토록 돼 있었다. 그렇지만 이 규정은 실제로 지켜지지 않았다. 더구나 당시의 총리 피지명자는 고명한 법학자 출신이었지만 사정은 전혀 다를 바 없었다.

우리 헌법의 정부기관 가운데 국무총리처럼 겉과 속이 판이한 자리도 없을 성 싶다. 흔히 총리는 행정부의 제2인자라고 일컬어진다. 헌법 규정을 보면,"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 각부를 통할한다"고 돼 있다. 아울러 헌법은 총리의 권한으로 여러 가지를 규정한다. 총리는 국무위원 임명제청 및 해임건의권을 가지며, 대통령의 모든 국법상 행위에 부서(副署)할 권한이 있고, 총리령을 발할 수 있다. 또한 총리는 국무회의 부의장이며, 대통령 유고시 권한대행 제1순위자가 된다.

헌법이 총리에게 부여한 이런 권한들에 비춰볼 때, 총리직의 지위 또는 성격을 어떻게 규정짓는 것이 적절한가. 국무위원 임명제청이나 해임건의는 대통령에게 구속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부서가 없는 대통령의 행위는 무효라고 보아야 할 것이지만, 부서 거부는 곧 해임당할 각오가 있음을 뜻한다. 행정 명령 가운데 중요한 것은 대부분 대통령령이며 총리령은 실질적 중요성을 못 갖는다. 국무회의는 심의기관이며 대통령에게 구속력을 갖는 의결기관은 아니다. 무엇보다 대통령의 총리 해임에는 아무 제한이 없다.

이렇게 보면 국무총리가 대통령과의 관계에서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실질적 권한은 없다. 흔히 '제왕적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하는 가운데, 헌법상으로는 대통령과 총리의 권한 분산이 이미 예정돼 있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그러나 이미 보았듯이 총리가 실질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으려면 대통령이 자신의 권한 행사를 스스로 자제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를 들면, 총리의 국무위원 임명제청에 대해 대통령이 이를 거부하더라도 헌법상 아무 문제가 없지만, 그럼에도 대통령이 총리의 제청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에만 총리는 실권자가 될 수 있다.

대통령이 스스로 권한을 분산시킨다면 이는 바람직한 일이다. 그렇지만 권력의 속성을 생각할 때 이런 기대가 과연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의문이다. 결국 헌법의 규정대로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보좌기관일 뿐이다.

문제는 종래 총리가 대통령에 대한 실질적 보좌기능도 못해 왔다는 점이다. 현실정치의 장에서 지금껏 총리의 실질적 존재 의의는 어디에 있었는가. 대통령이 책임져야 할 경우에 대산 속죄양 역할을 해온 것이 총리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물러남으로써 그 자리의 소명을 다하는 자리가 총리직이었다면 이런 역설이 또 어디에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고 총리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경우는 두 가지 뿐이다. 하나는 대통령과 대립해 물러나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대통령 유고시 권한대행자로서다. 이 모두 정상적인 경우는 아니다. 이런 총리 자리를 두고 시비가 분분하다.

곧 장상(張裳) '총리 서리'에 대한 국회 청문회와 동의 절차를 앞두고 있다. 최초의 여성총리 지명이 지니는 상징성은 대단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상징성을 위해 치러진 대가는 만만치 않다. 물러나야 할 사람들은 남아 있고 남아 있어야 할 사람은 밀려났다.

'張총리서리'의 여장부다운 풍모는 인상적이다. 외모만이 아니라 대장부 못지 않은 내공까지 쌓았는지는 아직 모른다. 張서리는 지명 받은 후의 일성에서 대통령선거를 앞둔 내각임을 강조했다. 만일 중립성을 깨는 국무위원이 있다면 그에 대한 해임 건의를 마다 않을 기개를 지니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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