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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러 친선특급 1만km동승기] 반듯한 텃밭·활기찬 시장 시베리아엔 변화의 바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철마(鐵馬)는 꼬박 3박4일을 달리고 또 달렸다.

지난 16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한·러 친선특급'이 지나간 시베리아횡단철도(TSR) 중 최장구간인 하바로프스크~이르쿠츠크 구간의 총연장은 3천3백36㎞. 서울~부산을 네번 왕복할 거리다. "4천㎞ 이하는 거리라고 부르지 말고, 영하 40도가 넘지 않으면 추위라고 말하지 말라"는 러시아인들의 배포가 부럽기까지 했다.

하바로프스크에서 시작된 차창 밖 풍경은 이르쿠츠크에 도착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강폭 2㎞가 넘는 아무르강 기슭을 따라가는 철로변으로 초록의 평탄한 숲이 끝없이 펼쳐지고 이름없는 작은 시내와 호수가 셀 수 없이 이어진다. 숲이 끝나는 자리엔 어김없이 러시아인들의 시골 별장이라는 다차와 나무 울타리를 둘러친 텃밭이 옹기종기 나타났다.

농민들은 텃밭에서 난 농산물만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었기 때문에 꽤나 정성을 들인 듯 텃밭의 모양이 반듯하다. 친선특급이 멈추는 간이역마다 시골내 물씬 나는 할머니들이 파는 빵이나 음식들은 바로 이런 농산물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뒤늦게나마 닥친 개혁바람 덕에 요즘 상당히 달라지고 있다. 공산당이 10년간 끈질기게 반대해온 농지거래법이 지난달 러시아 두마(하원)를 통과함에 따라 농지 완전 사유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텃밭에 묶여 왔던 농민들 사이엔 드넓은 유휴지를 경작해 대농장을 만들고 대지주로 도약하겠다는 꿈들이 꿈틀댄다고 한다.

침엽수림인 타이가에서 꽤 떨어진 남시베리아지역을 통과하는 TSR 노변은 온통 백색 외피를 자랑하며 늠름하게 곧추서 있는 자작나무 숲 천지다. 베어내면 그대로 재목이 되는 천혜의 삼림 덕택에 목재는 지난해 극동 하바로프스크주가 한국에 수출한 상품의 51.3%를 차지했다. 황혼이 깃들이는 아무르강 줄기를 따라 오호츠크해로 항해하는 중국과 러시아의 거대한 목재선들이 친선특급의 창을 스친다.

완만한 숲을 지나는 평탄한 여정이지만 개혁의 러시아를 가로지르는 열차답게 변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를 만났다. 17일 자정 무렵 친선특급열차가 아무르강을 지날 때의 일이다. 열차는 2.6㎞ 길이의 아무르 철교를 건너는 대신 20여분 동안 긴 터널을 지났다. 이 터널은 스탈린 치하 당시인 1945년 완공된 군사용 비밀 터널이다. 철교보다 수㎞ 하류를 완만하게 건너는 터널로는 70년까지 SS-21 등 전략핵무기 등 군사물자만 오갔다. 그러나 개혁 이후 TSR를 이용하는 물동량이 많아지자 모스크바행 TSR 열차에 대해서는 야간통행을 일부 허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확실히 '변화'는 시베리아의 키워드였다.

친선특급 탑승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역에 도착한 지난 16일. 역 앞 광장에서 타스통신의 바리보다 기자는 "굉장하다. 동방의 한국 같다"고 했다. 처음 이곳을 찾은 그의 눈에 블라디보스토크는 변화와 개혁으로 꿈틀대는 곳으로 비쳤던 모양이다.

시내는 도떼기시장이라고 표현할 만큼 복잡했다. 차는 많고, 막히고, 경찰은 딱지를 떼고, 사람들은 분주히 오가고 노점상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서울에 비할 수야 없겠지만 기자에게 비친 이곳은 '활력적'이란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특이한 것은 이곳을 한국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거리의 풍경이다.

시내를 가로질러 이동하는데 낯익게 생긴 버스가 '302-1 부산역'이란 한글간판을 달고가는 모습이 눈에 확 들어온다. '○○미술학원'이니 '○○식품'이란 한글 간판을 단 중고 버스들도 있고, 심지어 '○○동 이동파출소'라고 버젓이 써붙인 한국 경찰청 소속 버스들도 철창만 뗀 채 다니고 있다.

"한국어 표지판을 떼면 완전한 폐차로 보여 한글 마크를 단 중고버스들이 인기"라고 총영사관 관계자는 설명했다.

한국 붐은 이뿐이 아니다. 시내 대형 수퍼마켓 '이그나트'에선 한국 컵라면과 초코파이가 불티나게 팔린다. 지난해 이곳을 중심으로 러시아에선 한국 컵라면 1억5천만개가 팔렸다. 러시아 인구를 염두에 두면 러시아인 한사람마다 한개씩 사먹은 꼴이다.

이런 현상은 더욱 밀접해져 가는 한·러 관계의 한 단면이다.

연해주의 대 한국 수출입 규모는 지난해 3억7천만달러. 여기에 2000년부터 시작된 사할린 해저광구의 석유 수입을 포함하면 연해주의 대 한국 교역은 10억달러를 넘는다. 지난해 한·러시아 총교역량 28억6천만달러의 3분의1이 넘는 액수다.

이고르 이바노프 연해주 부지사는 "한국은 연해주의 최대 투자국"이라며 "발전된 산업기술과 양국의 인접성,극동 러시아의 5만명에 가까운 고려인 자원 등 세가지 조건이 충분한 경제협력의 토양을 제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르쿠츠크=정효식 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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