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메, 연애는 넘친디 진짜 사랑은 없당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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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연애란 말에서 봄바람에 실려오는 햇풀 냄새가 난다"며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씨는 『연애시집』이라 제목을 정했다. 새로 쓴 시와 미발표시 중 사랑시 62편을 추린 시집이다. 섬진강의 느린 물살처럼 인심 좋고 아이들을 좋아해 시인이란 명칭보다 '선상님'으로 불리는 김씨. 초·중·고 교과서에 두루 시가 실렸을 정도로 국민 시인의 반열에 오를 참인 55세 김시인이 작심하고 사랑 얘기만 한다.

"네가 보고 싶다/눈이 내린다/네가 보고 싶다/솔잎이 내린다/성긴 눈발 한 송이가 닿아도/떨어지는 솔잎같은,/그런 것이/사랑이리."('사랑'전문)

사랑하는 이의 눈길 단 한 번에 주먹만한 눈물이 돋는다. 손에 닫는 순간 끝나버리는 어젯밤의 꿈같다. 넘칠까 두렵고 모자라서 안타까운-. 그런데 시인이 보기에 요새의 사랑은 넘치기만 한다. 시인은 묻는다. 넘치는 사랑이 사랑일까, 치고 빠지며 잽만 날리는 사랑도 사랑인가.

"요새는 연애가 없어요, 잉-."

시인 축구대회 참가 차 17일 서울에 왔던 시인은 기자와 만나 위의 말을 여러 번 했다. "너무 가벼워 큰 일 났어. 연애가 없고 남녀관계만 있다니께요. 여자 손 잡으려면 몇 년을 기다려야 했는디. 참고 인내하고 오랫동안 공들이는 거, 그게 연앤디…. 요새는 너무 쉽게 말들을 해 싸."

"우리 시대의 최대 문제점은 사람들이 연애 불능에 빠졌다는 것이군요"라고 기자가 과장된 말로 동의하자 "그려, 그려"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길거리 모텔 불빛을 보면 '견딜 수 없는 존재의 괴로움'들이 느껴진다"며 "연애가 불가능한 건 자본주의가 허물어지는 징조며 그 끝에 섹스만 넘친다"라고 말을 받는다. 섬진강 맑은 물 이미지를 가진 시인 입에서 섹스란 말이 튀어나오니 '오메!' 주위 사람들 낯빛이 붉어진다.

그렇다면 『연애시집』에서 느껴지는 연애감정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그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이 세상이 꽉차리라는 다짐이다. 꼭 쥔 주먹에 땀이 스스르 흐르듯이, 앙다문 입에 세상과 싸울 힘이 있듯이. 대상에 대한 한없는 기다림, 자기를 버림으로써 그 사람과 하나가 되는 완벽의 경험. 배시시 미소짓는 그런 날들이 내게도 올까하는 기다림이 가득하다. 그 기다림은 사계(四季)와 함께 순환한다. 꽃이 펴도 당신이고 져도 당신이다. 당신, 당신, 당신, 사랑하는 내 당신께 "지는 무작정 기다리구 있구만요"라고 외친다.

"하얀 탱자꽃 꽃잎은 하나 둘 셋 넷 다섯 장입니다//…//꽃이야 지겠지요 꽃이야 지겠지요/저기 저 하얀 탱자꽃 꽃잎 다섯 장이 진다구요//그대도 없이 나 혼자 허리 굽혀 탱자꽃을 줍습니다."('그대 생각1' 중)

진실한 사랑은 주는 자, 기다리는 자의 몫이다. 밑져도 즐거운 게 사랑이란다. 등가 교환과 소비와 소유와 남을 제압하는 권력의 대척점에 사랑이 있다. 누구를 사랑할까 보다 어떻게 사랑할까가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러다 가끔 힘겨울 때 "빈 들에서/무를 뽑는다//무 뽑아 먹다가 들킨 놈처럼/나는 하얀 무를 들고/한참을 캄캄하게 서 있다//때로/너는 나에게/무 뽑은 자리만큼이나/캄캄하다"('빈 들' 전문)고 느낄 때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매화 필 때 섬진강 한 번 놀러오랑께. 끝내줘"-.

우상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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