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⑦ 충북 보은 대휴선원·끝:흰구름처럼 떠난 비구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8면

젖은 빨래 같은 비구름이 푸른 산자락에 걸려 있다. 송이버섯 향기를 머금은 산자락에는 조선 소나무들이 비구름으로 솔잎을 닦고 있고. 전생부터 치자면 수없이 보았을 터이지만 산길을 오르는 나그네 눈에는 또 다시 처음 보는 듯한 선경이다.

청산과 백운은 선방 안에도 있다. 청산이란 패(牌) 앞에는 절의 중요 소임을 맡은 수행자들이, 백운이란 패 앞에는 나그네 수행자들이 앉는 게 관행이라고 한다. 말없이 자리를 지키는 것이 청산이요, 흔적 없이 떠도는 것이 백운이고 보면 그런 앉은자리의 배치가 이해된다.

그러나 수행자들은 본능적으로 백운이기를 원한다. 이번 하안거 전까지만 해도 탈골암에서 오랫동안 총무 소임을 맡아보았던 비구니 성수(惺修) 스님도 걸망 하나 메고 어디론가 흰구름처럼 떠나고 없다.

나그네에게 쪽지 한 장 보내고 이미 한 달 전에 떠나고 없는 것이다. 나그네가 간직하고 있는 쪽지의 글귀는 다음과 같다.

'삼계가 우물 긷는 두레박줄 같아서/ 백천만겁의 미진수를 지내도다/ 이 몸 금생에 제도치 못하면/ 다시 어느 생 기다려서 제도할 것인가. 급히 하안거 결제를 하러 떠나면서 보내드립니다. 위의 게송을 새삼 새기면서요. 날마다 좋은 일만 있으시길 불전(佛前)에 기도 드립니다. 탈골암 성수 합장'.

머무르면 번뇌는 쌓이고…

나그네는 법당을 돌아 다시 천천히 선방을 기웃거려 본다. 마침 방이 비어 있어 사진을 찍는다. 조건이 까다롭다. 좌선 중인 수행자들을 절대로 촬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금기는 이곳만이 아니라 어느 선방이나 마찬가지다.

선방 주련의 글귀가 나그네의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한다. 발걸음을 붙잡는다. 선 수행자들의 정진의지를 북돋우는 게송이다. 바로 성수스님이 보내준 쪽지의 글귀다.

삼계는 마치 밑이 끝도 없는 우물을 푸는 두레박줄 같다고 하니 얼마나 컴컴한 곳인가. 중생은 그런 무명(無明) 속에서 헤매고 있다. 그러니 귀한 생명을 받아 숨쉬고 있는 금생에 번뇌의 두레박줄을 끊고 해탈하자는 게송이 아닐 수 없다.

대휴선원(大休禪院).

돌아가신 불국사 월산스님이 조실로 계실 때 '대휴(大休)'를 향해 정진하자고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대휴란 크게 쉰다는 뜻이다. 선방에 들어서는 수행자 모두가 안으로는 헐떡이는 마음을 쉬고, 밖으로는 구하는 마음을 쉬어 일체 번뇌의 뼈를 벗어버리게 한다는 탈골암 주지 혜운(慧芸) 비구니스님의 원(願)이다.

달마 女제자'총지'의 후예들

탈골암은 신라 성덕왕 15년(720)에 창건됐다고 전해진다. 창건주에 대한 기록은 없고 창건 역사만 알려져 있다. 그러니 당시 성덕왕을 주목해 본다. 왕은 불가와 인연이 깊었다. 셋째 아들과 딸의 출가를 허락한 왕인 것이다.

셋째 아들이 바로 중국 당나라로 건너가 마조의 스승이 됐다고 전해지는 무상스님인데, 그가 출가한 것은 막내 여동생에게서 감화 받은 바 컸다. 막내 여동생은 불법을 신봉하며 성장한 공주로서 나이가 차자 자연 혼담이 오고가게 됐다. 그러나 여동생은 출가의 서원이 있어 아름다운 얼굴에 스스로 상처를 내고는 자신의 결심을 왕에게 알렸다. 이에 오빠였던 무상도 즉시 머리를 깎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 채 당나라로 건너갔다고 한다.

"아, 가냘픈 여자조차도 정조를 아는데 굳센 장부인 내가 어찌 가만히 있을손가 !"

비록 탈골암 주지를 맡고는 있으나 혜운 스님의 기질은 철저히 선객이다. 나그네의 글을 인상깊게 읽었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상(相)은 감춘다. 선방을 개설한 절의 주지는 보통 외호(外護)라는 소임을 맡는다. 외호는 말 그대로 선방 밖에서 수행자들을 뒷바라지하는 역할이다. 그런데 혜운스님은 안거에 들면 선방 수행자들과 똑같이 참선정진에 든다고 한다.

문득 달마의 제자 총지(聰持)라는 비구니 수행자가 떠오른다. 나그네가 알기로는 중국 선종사에 보이는 최초의 비구니가 아닐까 싶다.『전등록』에 총지가 보이는 구절을 요약하면 이렇다.

달마가 제자들에게 말했다.

"너희들 각자 수행을 통해 이룬 것을 말해보라."

먼저 도부가 대답했다.

"진리는 문자에 집착하는 것도 떠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도를 깨닫는 도구일 뿐입니다."

"너는 겨우 내 거죽을 얻었구나."

다음에는 비구니 총지가 말했다.

"법(진리)은 불국토를 잠시 보는 것과 같습니다. 한번은 볼 수 있어도 두 번 다시 볼 수 없습니다."

"너는 내 살을 얻었다."

그러자 도육이 말했다.

"사대(四大)는 본래 공(空)한 것입니다. 오온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터득할 만한 법은 없습니다."

"너는 내 뼈를 얻었다."

안팎 마음 '큰 쉼' 위해 정진

마지막으로 혜가가 말할 차례였다. 그러나 그는 잠자코 침묵했다. 이에 달마가 그에게 정법안장을 했다.

"너야말로 내 골수를 얻었다."

대휴선원 선방에서 정진하는 비구니 수행자들이야말로 달마의 제자 총지의 후예들이다. 물론 훗날의 총지도 더욱 정진해 혜가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하안거 중인 선방 수좌들의 경계가 궁금해진다. 달마가 지금 나타나 그대들이 수행을 통해 이룬 것을 말하라 한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 그러고 보니 혜가의 침묵이야말로 대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