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소 실은 '열차 코미디' '신라의 달밤' 닮은꼴 느낌 아쉬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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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라이터를 켜라'는 박정우 작가의 영화다. 이 영화로 데뷔한 장항준 감독에겐 좀 외람된 말이지만 그만큼 작가의 색깔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가 시나리오를 써서 히트한 대표작으론 '주유소 습격사건'과 '신라의 달밤'을 들 수 있다.

주로 남성의 폭력 세계를 다루면서도 중간중간 맛깔나는 유머로 작품 전체를 경쾌하게 끌어가는 코미디적 재능이 탁월하다. 또 겉으론 드러나지 않지만 정치권으로 대표되는 기성 사회를 꼬집는 풍자가 수준급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마구잡이 격투 신도 난삽해 보이지 않는다.

다소 부정적으로 평가하면 '라이터를 켜라'는 지난해 4백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대히트한 '신라의 달밤'을 충실하게 복제한 작품으로 보인다. 물론 두 영화는 엄연히 다르다. 일단 영화의 무대가 경주('신라의 달밤')에서 새마을호 열차로 바뀌었다. 하지만 두 작품은 인물·구성·화면 등에서 닮은꼴처럼 느껴진다.

'라이터를 켜라'는 '신라의 달밤'의 웃음에 속도감을 더했다. 최고 시속 1백40㎞의 서울발 부산행 열차에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액션과 코미디를 구현했다. 할리우드 영화 '스피드'처럼 속도감 자체를 무기로 내세운 영화는 아니지만 그래도 달리는 기차 안에서 펼쳐지는 '사나이들의 전투'는 긴박하다.

'라이터를 켜라'의 최대 수혜자는 김승우가 될 것 같다. TV 드라마·영화 등 많은 작품에서 주로 '폼잡는' 귀공자형으로 나왔던 그는 이번에 어리바리한 성격의 허봉구를 연기했다. 다소 모자란 듯하면서도, 그래서 숱하게 얻어맞으면서도 종국엔 뚝심 하나로 승리하는 인물이다. 풀린 듯한 눈동자, 굼떠 보이는 몸놀림, 황소처럼 우직한 성품을 여유있게 소화했다.

그의 상대역은 차승원이다. '신라의 달밤'에서 깡패 출신의 '회개한' 교사로 깊은 인상을 남겼던 그는 이번에 '폼생폼사'형의 건달 보스 양철곤으로 나온다. '졸개'들 위에 군림하는 '주군'이지만 아내 앞에선 쩔쩔매는 밉지 않은 인물이다.

영화의 소재는 3백원짜리 라이터다. 제대를 하고 아무 곳에도 취직 못하고 놀던 봉구가 전재산 3백원을 털어 구입한 라이터를 화장실에서 분실하고, 이를 습득한 철곤을 따라 서울에서 부산까지 내려간다는 줄거리다.

목적은 단 하나, 라이터를 되찾기 위해서다. 잃어버리면 그만인 1회용 라이터를 둘러싸고 빚어지는 해프닝이 폭소를 유발한다. 서울에서 출발, 천안·대전을 거쳐 부산까지 역마다 얘기를 매듭짓고, 또 다시 시작하는 구성도 비교적 야무진 편이다.

조연 배우들의 협연도 훌륭하다. 철곤이 돈을 받기 위해 부산까지 추적해 내려가는 대상인 악덕 국회의원 박용갑(박영규), 틈만 나면 사회에 대한 불평을 따발총처럼 쏟아내는 떠벌남(강성진), 상황 판단이 늦어 항상 철곤에게 구박을 받는 귀여운 악당 찐빠(이문식), 위기의 순간에도 자기 몸만 보전하려는 소시민 스타일의 침착남(유해진) 등이 영화를 든든하게 받쳐준다.

'라이터를 켜라'는 영악한 작품이다. 치고 받는 액션의 홍수 속에 군기가 빠져 보이는 예비군 훈련장, 왁자지껄한 호프집의 동창회 풍경을 삽입해 호흡을 조절하고, 박용갑·떠벌남을 통해 위선·모순이 가득한 한국 사회를 비꼰다. 또 결정적 순간에 당찬 용기를 발휘해 '못난' 남자들의 뺨을 때리는 싸가지(김채연)를 양념격으로 등장시켜 여성들의 쾌감을 자극한다.

그럼에도 영화는 신선감 면에선 떨어진다. 지난해 이후 극장가를 점령했던 여러 코미디 영화의 장점만을 모아놓은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과연 관객들의 감성도 그대로일지? 막판에 "아내를 사랑한다"며 눈물을 흘리는 철곤의 신파조 연기도 개운하지 않다. 17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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