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론 脈을 꿴 평론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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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훌륭한 작품론을 쓰는 것은 훌륭한 문학사를 쓰는 것과 같다". 『현실과 문학적 상상력』에 실린 20여편의 평문(評文)중의 하나에서 비평가 폴 드 만의 주장 인용(2백4쪽)이 눈길을 확 끈다. 저자인 문학평론가 이태동(서강대 영문학과)교수가 평론작업에 임하는 태도를 일정하게 암시해주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머리말에 비치는 저자의 소회(所懷)에서도 이번 평론집에 보이는 자부심이 엿보인다.

"영문학을 하는 사람이지만 한국인으로서 모국어의 토착적 아름다움에 대한 애정 때문에 지난 30년 동안 우리 문학을 읽고 글을 써왔고 이제 어느덧 저문 강에 이르렀다. …이번 네번째로 출간하는 이 책은 논의한 작품들의 의미를 확대시킨 비평적 반응의 스펙트럼 덕분에 적지않은 완성미를 지니고 있다."

이런 자부심은 책의 구성 면에서 확인된다. 저자는 고대 신화 이후 근현대의 김동리·최인훈·유치환·김춘수·유경환·정현종 등의 시작품에서 일관된 흐름으로 보이는 한국소설의 주제가 '자연과의 친화'라고 규정한다. 이런 판단 때문에 이 책의 1,2부에 포함된 6개의 평문은 개별적인 작품론·작가론이면서도 폭넓은 한국문화론의 울림으로 연결된다.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1960년대 평론가 이어령이 발표했던 '장군의 수염'에 대한 재평가. 저자는 이 작품이 "문학사 속에서 정당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한 채 묻혀있었다"고 지적하며 최인훈의 '광장', 김승옥의 '무진기행' 등과 함께 그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문학텍스트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 평문은 옳고 그름을 떠나 기왕의 문학사와 비평행위의 유행과 쏠림구조에 대한 용기있는 이의제기로 평가할 만하다.

문제는 있다. 균형잡히고 진지한 시각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거론된 작가들 중 80년대 이후 작가들은 거의 없다는 허전함이 우선 그것이다. 이런 취약점 때문에 저자가 소망하는 '새로운 비평적 중심'이 확보되기에는 다소 힘에 부쳐 보인다. '문학의 죽음'이 거론되는 요즘같은 다매체 다채널의 시대에 이 책의 갸날픈 목소리는 적지아니 공소하게 들린다는 점을 지적하려 한다.

조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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