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바깥의 삶에 관심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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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신경림 시인의 '집으로 가는 길'(4일자 18면) 한 토막. 문화면은 이런 재미로 읽는다.

"지나고 보면 한결같이 빛 바랜 수채화 같은 것. 거리를 메우고 도시에 넘치던 함성도, 물러서지 않으리라 굳게 잡았던 손들도. 모두가 살갗에 묻은 가벼운 티끌 같은 것."

6월의 신문을 나름대로 정리하면서 하고 싶었던 말이 마침 여기 있어 시인의 용서를 바라며 옮긴다.

지난달 전국의 도시에 넘친 함성을 만약 '인간의 대지'를 쓴 생텍쥐페리가 들었다면 열광하는 인간 하나 하나의 삶은 각각 어떤 색일까 궁금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미디어들은 인간보다 군중에만 열광했다. 그래서 '열망의 하나됨'을 바로 '국민의 하나됨'으로 찬미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태극기와 붉은 티셔츠로 출렁거린 6월은 콤플렉스의 우리 역사에 대한 후련한 반란이었고 뻐근한 일상을 박차버린 카타르시스임에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드라마같은 응원과 '한국 축구'에 들뜬 미디어가 세상의 다른 일들을 소홀히 했다면 이에 관한 뒷정리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살갗처럼 우리를 덮고 있는 일상은 시인의 말대로 6월의 기억도 티끌처럼 묻힌 채 흘러갈 것이기 때문이다.

월드컵 결산 좌담 시리즈(1~4일자 8면)는 좋았다. 리더 자질의 절대적 중요성을 보여준 한국 축구의 메시지를 확산하고 우리의 교육·문화·정치의 리더십 수준을 진단하는 일도 필요하다. 그런데 정작 월드컵 보도는 어떠했는가. 무엇보다도 한국을 보는 세계의 시선에만 신경 썼지 우리가 세계를 만나는 일에는 소홀했다. 국가 이미지나 경제적 효과 중심의 보도도 문제였지만 자연스럽게 한국인의 관심을 세계로 인도할 문화적 소재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문화는 민속축제 같은 이벤트나 관광이 아니다. 문화는 인간의 삶에 대한 호기심이다. 세계화의 시작도 관심의 세계화다. 그러나 폴란드의 역사나 터키의 삶은 여전히 우리의 관심 밖에 있고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예술과 건축은 붉은 물결의 위용에 가려졌다. 거창하게 볼 것 없다. 예컨대 상대국의 국가(國歌)·국기의 유래, 그리고 경기장과 중계방송의 연결체계 등 개최국의 프리미엄을 활용할 수 있는 즐비한 흥밋거리는 외면한 채 무섭게 불어나는 거리 응원과 경기장의 열기만 전달하기에 급급했다.

갑자기 달라진 한국 축구와 사회분위기를 여러 각도에서 전하려는 철저함도 없었고, '태극전사'라는 수사적 표현을 남용하는 데 대한 제동도 없었던 반면, 해외언론과 외국인의 입을 통해 한국의 위상 변화를 확인하려는 관행은 여전했다. '감동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애쓰기보다는 한국 축구에 대한 감격과 세계 축구의 재미 사이에 있어야 할 최소한의 경계선도 허문 채 승리의 기쁨을 국산화하는 데만 열중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임권택 영화와 히딩크 축구의 엇갈린 명암(6일자 6면, '문화동네 손익계산서'), 월드컵에 가려진 일상(2일자 6면, '월드컵에 가려진 아픔들'), 6월 열광의 분석(3일자 18면,'거리의 붉은 물결 마냥 아름다운걸까')처럼 6월을 정리하는 7월의 자세는 그래서 중요하다.

다만 6·13 지방선거 이후의 정치 기류, 뇌사상태에 빠져 있는 국회, 의료노조 파업과 외국인 노동자의 삶, 미군 장갑차와 고압선 사고 등 치우친 눈길 때문에 축소되었거나 가라앉은 월드컵 바깥의 삶들에 대한 기록도 '광장의 기억'과 함께 소중한 일상의 자리에 되돌려야 한다. 전혀 다른 성분의 눈물을 흘렸던 1980년대의 '광주'와 서울의 광장에 2002년의 '신화'와 함성을 쑥스럽지 않게 입장시킨 미디어의 위력을 진정 자축하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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