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응찬 ‘50억 차명계좌’ 다시 도마위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신한금융지주, 국내에서 가장 몸값이 비싼 금융회사다. 시가총액이 22조7853억원으로 금융권 1위다. 자산 규모는 KB금융보다 작지만 은행·증권·카드·보험 등에서 고루 돈을 잘 버는 회사다.

이런 회사를 일궈낸 라응찬(72) 회장이 금융실명제법 위반 혐의로 금융감독원의 조사를 받게 됐다. 금감원 조사의 여파가 라 회장의 거취 문제로 번질 경우, 신한지주의 지배구조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또 조사를 못한다고 하다가 정치권의 압력과 여론에 떠밀려 라 회장에 대한 조사를 하기로 한 금감원에 대한 책임 문제도 제기될 전망이다.

<본지 6월 23일 E7면, 24일 E7면>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실명제 위반의 쟁점=라 회장은 지난해 초 검찰 수사로 곤욕을 치렀다. 2007년 2~3월 다른 사람 명의로 된 계좌에서 50억원을 빼내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게 전달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당시 라 회장은 “골프장 투자를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고, 검찰은 “이 돈은 개인 자금으로 범죄의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내사종결했다. 그러나 은행장을 세 번, 금융지주회사 회장을 네 차례 연임한 라 회장이 차명계좌를 통해 개인 돈을 관리했다는 금융실명제법 위반 논란은 남았다. 현행 금융실명제법에서 형사처벌을 하거나 과태료를 부과하는 대상은 일반인이 아니라 금융회사 임직원이다. 일반인이 차명거래를 한 경우 불법자금이 아닌 이상, 차명계좌에서 나온 수익에 대해 세금만 납부하면 다른 책임은 지지 않는다.

이에 비해 예금주의 금융정보를 다른 사람에게 누설한 금융기관 임직원은 형사처벌(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받는다. 금융회사 직원이 실명 거래를 하지 않았을 때는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 처분을 받는다. 금감원의 제재도 뒤따른다. 금감원에 따르면 금융회사 직원이 고의로 3억원을 초과하는 비실명거래를 하는 경우 ‘정직 이상’의 중징계를 받는다. 비실명거래를 하도록 지시한 사람도 차명계좌를 만든 직원과 동일한 제재 대상이다. 만일 라 회장이 부하 직원들에게 직접 차명계좌를 개설하도록 지시했다면 해임권고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라 회장 측은 “금융실명제가 실시되기 전에 관리하던 차명계좌가 있었지만 임직원 명의는 아니다”고 해명했다. 또 “총액만 보고받았을 뿐 차명계좌를 운용하는 데 관여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회장 자격 유지 논란=라 회장은 실명 전환을 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10여 년간 차명거래를 통해 자금을 관리한 사실이 검찰 수사 결과 드러났다. 금융지주회사법은 ‘금융지주회사의 임원은 회사의 공익성 및 경영의 건전성과 거래질서를 해칠 우려가 없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은 “10여 년간 수십 개의 차명계좌를 갖고 불투명한 거래를 한 사람은 금융회사 수장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라 회장 측은 “범법 행위가 없었고 임원 자격 유지에도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지난 3월 라 회장이 4연임을 할 당시 금융당국이 적격성 심사를 제대로 했느냐는 문제도 제기된다. 지난해 검찰 수사 과정에서 차명거래가 드러난 만큼 적극적인 판단을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감독당국은 당시 아무 조치를 하지 않았다. 지난달 김종창 금융감독원장은 국회 정무위에서 “실명제 조사를 위해서는 구체적인 정보가 있어야 한다”며 조사에 수동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민주당 측이 “정권실세가 라 회장을 비호하고 있어 김 원장이 조사를 미루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자 결국 ‘백기’를 들었다. 그동안 “검찰에 먼저 자료를 요청한 전례가 없다”고 주장하던 금감원은 이날 “언론 등에서 의혹을 제기하고 있어 검찰에 자료를 요청키로 했다”고 설명했다. 익명을 원한 은행권의 고위 임원은 “자료가 없어 조사를 못한다고 했다가 이제 와서 자료를 요청한다는 것은 검사와 감독이 무원칙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지적했다.

김원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