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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기업 DNA 달라졌다] ⑤ 롯데의 ‘글로벌 DNA’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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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롯데그룹은 글로벌 시장, 특히 베트남·러시아·인도네시아·중국을 전략 지역으로 정했다. 롯데마트가 이달 초 베트남 호찌민시에 연 ‘푸토점’의 전경. 베트남 2호점이다. [롯데마트 제공]

◆국내외 안 가리는 M&A=롯데는 2000년대 들어 숨가쁜 인수합병(M&A)으로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M&A 큰손으로 자리 잡았다. 2000년 이후 성사시킨 M&A 23건 중 해외 M&A가 중국·인도네시아 마크로, 벨기에 길리안 초콜릿, 중국 타임스 등 4건이다. 롯데그룹 고위 관계자는 “그동안 롯데는 역량이 있지만 실행은 소극적이라는 평가가 많았는데 2018 비전 수립 후 목표가 뚜렷해지면서 의사결정도 빨라졌다”고 말했다. 인수 자금을 마련하는 것도 내부 유보금에만 의존하지 않고, 외부 차입을 활용한다. 예전의 롯데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신격호 회장의 지론인 ‘거화취실(去華就實·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을 배제하고 내실을 지향한다)’과는 사뭇 다르게 그룹의 DNA가 글로벌·공세로 바뀌고 있다. 보수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DNA가 그룹 내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애널리스트는 “국내 성장이 한계에 달한 식품·유통업을 탈피해 사업을 다각화하고, 글로벌 시장으로 나가려면 M&A 외에는 방법이 없다”며 “방향은 적절하게 잡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M&A는 필연적으로 직접 뛰어들어 바닥부터 시작하는 것보다 돈이 많이 드는 방식”이라며 “그간 롯데가 사들인 기업들의 인수가격이 적당한지에 대한 판단은 몇 년을 기다려봐야 한다”고 말했다.

◆“글로벌 인재를 확보하라”=롯데는 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대신 핵심 전략지역으로 VRICs(베트남·러시아·인도네시아·중국)라는 표현을 쓴다. VRICs를 잘 아는 인력을 확보하고, 현지를 이해하는 데 그룹의 성패가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신동빈 부회장이 “지점장들 편하자고 운전기사를 한국인으로만 쓰면 어떻게 현지 사회를 이해하고 공감을 얻겠느냐”고 그룹 임원회의 때 불호령을 내린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내수에 치중하던 2006년만 해도 손에 꼽을 정도였던 해외 인력은 현지 채용인을 포함해 약 3만여 명으로 늘었다. 2007년 러시아에 백화점을 개점할 땐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인력이 부족해 파견 직원을 찾는 데 고생했다. 지금은 VRICs 지역 연수를 마친 직원들이 1000여 명에 달한다. 이외에도 4~5명이 한 조가 돼 VRICs 국가를 가본 후 보고서를 작성하는 ‘브릭스 연구회’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룹 인사팀장 윤종민 상무는 이달만 해도 미국 시카고→중국 상하이·베이징→베트남 하노이·호찌민을 거치는 강행군을 했다. 그룹 인사팀 인력의 40%는 해외 인재를 뽑는 임무에 투입되고 있다. 최소한의 인원만 파견하고 현지에서 인력을 키운다는 원칙으로 중국과 베트남에서는 현지 대학생 신입사원을 공채로 뽑는다. 중국은 4년째, 베트남은 2년째다. 채용된 해외 신입사원들은 10개월 동안 한국에 와서 연수를 받는다.

◆젊고, 공격적인 기업으로=롯데의 계열사 대표는 전통적으로 60세 이상이 주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계열사 대표에 50대가 눈에 많이 띈다. 주력 계열사인 롯데백화점에는 40대 임원도 등장했다. 롯데마트는 임원의 10% 정도는 40대다. 요즘 웬만한 회사에선 찾기 힘든 ‘계장’ 직함은 올 5월 없애고, 대리로 바꿔 달았다. 그룹 전체 임원 중 20%는 외부 수혈 인력이다. 그룹 관계자는 “롯데의 정체성을 깨보자, 하이브리드로 가보자는 시도가 활발히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전체 승진 중 5%인 발탁 승진 비율을 10%까지 늘려나갈 방침이다.

2005년 대졸 공채 중 여성은 10%대에 그쳤으나 지금은 30% 수준으로 늘었다. 신 부회장이 “여성들을 그만큼 뽑아서 되겠나. 더 뽑아야 하지 않나”라며 직접 챙기고 있다. 실적에 따른 보상도 도입됐다. 롯데백화점의 한 직원은 “롯데는 월급 적게 주는 대신 오래 다닌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적어도 적게 준다는 것은 옛말”이라며 “간부급의 경우 3년 연속, 해마다 수천만원씩 성과급을 손에 쥐었다”고 말했다.

◆앞으로의 과제=식품·유통업 모두 글로벌 강자들과의 경쟁이 기다리고 있다. 세계적 백화점인 일본 이세탄도 해외 진출 11년 만에 흑자로 전환했을 정도로 글로벌 유통시장에서 성공하는 게 만만치 않다. 익명을 요구한 애널리스트는 “롯데쇼핑 주가가 좀처럼 공모가(40만원) 수준으로 회복하지 못하는 것은 다분히 ‘롯데 디스카운트’ 때문”이라며 “보수적이고, 비밀스러운 그룹의 이미지에서 과감히 벗어나 새로운 DNA를 심는 데 성공한다면 주가도 정상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롯데 고위 관계자는 “한 번에 다 바꾸긴 힘들겠지만, 경영층이 ‘하다가 실패하면 안 된다’가 아니라 ‘하다가 실패하면 다시 하면 된다’란 말을 수시로 할 정도로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최지영 기자



베트남 마트, 거스름돈 바닥나 진땀

해외 진출 좌충우돌서 배운다

글로벌 사업 초기 해외주재원으로 나간 롯데그룹 직원들은 언어와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그룹의 주력 계열사가 현지인과 매일 마주치는 유통·서비스여서 그만큼 시행착오도 많았다.

베트남 롯데리아 시설개발팀의 이장묵 팀장은 2008년 부임 초기 저녁에 현지 롯데리아 매장을 점검하러 방문했다가 깜짝 놀랐다. 롯데리아 매장이 입점한 상가 전체가 정전이 된 것이다. 이 팀장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점포 안의 고객들은 태연하게 음식을 계속 먹었다. 이 팀장은 나중에야 베트남은 건기가 길어지면 수력발전소가 제대로 가동되지 않아 정전이 잦고, 이에 익숙한 베트남 사람들은 일을 멈추거나 당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롯데백화점이 러시아 모스크바에 처음 문을 열었을 때 러시아 직원들은 물건을 사지 않는 고객들에게까지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한국 백화점의 서비스가 이해되지 않아 혼란스러워했다. 현지 사정을 잘 몰라 입점시킨 브랜드가 실패하는 경우도 많았다. 추운 나라여서 뜨끈한 돌침대가 잘 팔릴 것이란 기대감에 입점한 한국 돌침대 업체는 한 개도 못 팔고 짐을 쌌다. 러시아에선 돌 위에 죽은 사람만 올라가는 풍속이 있다는 점을 간과한 탓이었다. 개점 2년 후 러시아인의 기호에 맞는 방향으로 매장을 개편하면서 매출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베트남은 신용카드 사용률이 낮고, 통상 현금으로 거래한다. 롯데마트 베트남 1호점인 남사이공점 오픈 때 거스름돈을 대량으로 준비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고객들이 예상보다 많이 몰리면서 미리 준비한 거스름돈은 금세 바닥이 났고, 은행을 수도 없이 오가며 거스름돈을 확보하느라 진땀을 뺐다. 지금도 남사이공점의 현금 사용률은 전체 매출의 95%에 달해 30% 수준인 한국과는 큰 차이가 난다.

해외 매장에서 자체상표(PB) 브랜드의 이름을 잘못 정해 당황한 경우도 있다. 롯데마트의 PB 대표 브랜드는 ‘와이즐렉(Wiselect)’. 이를 그대로 인도네시아에서 쓰려다가 ‘즐렉’이 인도네시아어로 ‘못생겼다’ ‘나쁘다’는 뜻이라는 걸 알게 돼 급히 바꾼 경우도 있다. 인도네시아 국민은 매장 계산대의 줄이 길어져도 불평하지 않고 한 시간씩 기다리는 게 보통이다. 처음 부임한 한국 롯데마트 직원들은 현지 채용 인력들이 고객들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는 것에 당황하기도 했다. 롯데가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해외시장에서 값진 경험을 쌓고 있는 것이다.  

최지영 기자



확장 따른 위기관리 시스템 필요
김언수 교수 기고 … 롯데, 다음 과제는

롯데는 자타가 공인하는 보수적이고 신중한 그룹이었지만, 2009년 매우 공격적으로 성장 지향의 비전을 수립했다. 내수 위주의 사업구조에서 탈피해 글로벌 성장과 혁신을 강조한다.

매출액을 비전으로 설정해 해석의 논란을 줄이고 명확한 수치를 지향점으로 삼은 점은 일견 긍정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부작용은 주의해야 한다. 유사한 형태의 비전을 세웠던 기업 중 월마트는 성공했고, IBM은 실패했다. 적합성이 떨어지거나 관리하기에 벅찬 사업들, 혹은 영양가 없는 사업들에 손을 대 ‘확장을 위한 확장’을 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해야 한다.

빠른 성장을 위해 인수합병(M&A)은 불가피하다. 롯데는 재무구조가 탄탄하고 현금을 많이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M&A를 하다 보면 자원이 의외로 빠르게 고갈될 수도 있다. 외부 성장과 함께 궁극적인 경쟁력의 근원이 될 내부 역량, 특히 연구개발(R&D) 역량 개발과의 균형도 고민해야 한다.

롯데는 계열사가 이미 50개사를 훌쩍 넘어섰고 그 숫자는 더 늘어날 것이다. 비전을 달성하려면 지금 있는 계열사들도 2018년까지 보통 3~4배의 성장을 해야 한다. 이럴 때 직면하게 될 가장 큰 문제는 그 모든 사업을 제대로 관리할 ‘사람’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최근 3~4년 동안 롯데는 눈에 띄게 직원 교육에 과감한 투자를 하고 있다. 그러나 할 일은 많아지고 시간은 부족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외부 영입이 증가하게 된다. 이럴 때 내부자들의 소외감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가 과제다.

정기적인 회장 보고로 대표되는 롯데의 경영 시스템은 비용과 실수를 최소화하는 메커니즘이다. 지금까지의 롯데의 안정적인 성장과 성공을 이끈 요인 중 하나다. 당연히 지금까지의 내부 시스템과 인력 등은 실수를 줄이는 방향에 맞게 짜여 있다고 봐야 한다. 과감한 혁신과 차별화를 위해서는 이를 어떻게 바꿔 나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안정지향적이고 연공서열적이었던 롯데에서 젊은 최고경영자(CEO)들이 전진 배치되고 관리자들의 특진 사례도 많아지는 것은 긍정적이다. 그만큼 현명한 위험관리 시스템이 필요하다.

롯데 고유의 보수성을 완전히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가는 돈이 단기적인 운영에 들어갔는지, 혹은 장기적으로 전략적인 투자를 한 것인지 잘 따져 볼 일이다. 보수성과 공격성, M&A로 인한 외부 성장과 유기적 성장, 외부 인력 영입과 내부 인력의 개발, 이런 부분에서 적절한 균형 잡기가 필수다.

김언수 교수 고려대 경영대학 (경영전략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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