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와 주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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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미국의 군사 예산은 세계 군비 지출의 3분의1이 넘고, 미국 다음 9개 강대국의 지출 총액보다 많다. 그래서 어떤 적대국들도 감히 도전할 수 없는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 미국이 자의로 '불량배 국가'라고 지목한 나라들이 있지만 이들이 정말 미국 안보에 중대한 위협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국제사회에 말들이 많다.

IT·증시 거품의 신경제

그러나 경제력은 형편이 다소 다르다. 일례로 미국의 국내총생산은 세계 전체의 3분의1이 안되고, 9강 전체 규모에도 크게 못미친다. 그렇다고 미국 경제가 그 경제력만큼만 힘을 쓰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 경쟁은 폭탄만 사용하지 않을 뿐 그 냉전적 대결은 열전 못지않게 집요하다. 경제계 일각에 V자와 W자를 놓고 '경기 타령'이 한창이다. 1990년대 신경제 전개로 종래의 경기 순환은 끝났고, 그래서 경제학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한다고 기염을 토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10년 호황 끝에 신경제 행진이 주춤하면서 이들의 믿음도 흔들렸으나, 9·11테러 악몽을 딛고 경기가 살아나자 이들은 용기를 되찾았다. 연말을 고비로 미국 경제가 본격적인 회복기에 들어섰다고 믿는 사람들은 V형을 주장하고, 일시적 회복 뒤에 새로운 불황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W형을 내세웠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V형 경기는 신경제 예찬자들이 간직한 미련의 산물이기 쉽고, W형 경기는 '구경제'에 숙달된 고집의 소산일지 모르겠다. 금주 들어 갑자기 세계 증시를 강타한 미국발 금융 불안은-금융 불황 징후는-후자의 손을 들어주는 느낌이다.

1달러가 1.015유로까지 떨어졌다. 추락하는 모든 것은 날개가 있다는데 최근의 달러 추락에는 날개조차 없는 모양이다. 1달러=1유로 시대가 느긋하게 연말께 오지 않겠느냐던 외환 전문가들의 점괘가 무색하게 당장 '이변'이 벌어질 판이다. 1달러=1유로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달러와 맞먹자는 유로가 미국으로선 자존심 상하는 일일 텐데 부시 대통령은 달러 하락을 방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나는 달러 약세의 '원죄'를 신경제에서 찾는다. 신경제는 정보기술(IT)의 혁신과 증시의 거품이 만들어낸 공모의 산물이다. 구경제가 숭배하던 수확 체감 원리가 끝장나고 '수확 체증'의 새 시대가 열렸다고 자부하던 정보기술은 애초의 기대만큼 고용과 소득에 기여하지 못했다. 그 신기루에 들떠 주가가 과도하게 부풀었으며, 이 거품을 담보로 가계는 마구 소비를 늘렸다. 그 통에 급증한 해외 수입으로 지난해 상품 수지는 무려 4천3백억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그런데도 미국 경제가 버틴 것은 외자 덕분이었다. 장사는 거덜났지만 빚을 얻어 파산을 면한 것이다.

외자 유입에는 증시의 호황이나 '강한 달러'가 요청된다. 테러와 회계 부정 같은 장외 요인이 주가 유지에 부담을 주었고, 경기 부양을 위한 연준(FRB)의 금리 인상 보류 방침은 강한 달러에 제동을 걸었다. 증시에 거품이 빠지면서 미국 경제가 외자 이탈과 '약한 달러' 국면으로 돌아선 것이다. 달러가 약하면 상대 화폐는 강하게 마련이다. 강한 유로가 수출에는 부담이 되겠지만 전체 교역의 68%가 역내에서 이뤄지는 유럽연합은 물가 안정과 외자 유입의 재미가 쏠쏠한 달러 약세를 은근히 반기는 표정이다. 강한 원화 역시 더 강한 엔화(円高) 때문에 채산성 악화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수출을 과중하게 압박하지 않는단다. 그러나 원화 절상 속도가 엔화를 앞질러 원-달러 환율이 연내에 1천1백원까지 떨어지리라는 예측마저 나도는 판이어서 마냥 엔고의 곁불만 쬘 수는 없게 생겼다. 더욱이 달러의 직접 사격권에서 벗어난 약한 위안화(元低)의 추격은 한층 심할 전망이다.

円高와 元低 틈새 뚫어야

1985년 레이건 정부는 달러의 강제 절하를 위해 선진5개국(G-5) 중앙은행들이 공동으로 시장에 개입하는 '플라자 협정'을 유도했다. 상대국들은 인위적 환율 조정보다 긴축을 통한 미국의 무역적자 해소를 바랐지만, 그들 모두의 주먹보다 더 강한 미국의 주먹에 굴복하고 말았다. 구경제 불황 탈출에는 강한 주먹으로 약한 달러를 만들어냈지만, 신경제 불황 탈출에서는 약한 달러로 강한 주먹을-수출 강공을-노리는 듯하다. 약한 원으로 우리가 수출을 늘린 것처럼 미국도 약한 달러로 수출을 늘릴 권리가 있다! 다만 이웃을 괴롭히는 주먹같은 것이 없이도 가능한 국내 긴축은 왜 항상 논외 사항인지 그것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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