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정치 올인에서 경제 올인으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연말이 되면 아무래도 회고 취미에 젖게 마련이다. 숱한 상념들이 뇌리를 훑고 지나가지만 내게는 특별히 반데를레이 데 리마가 기억에 남는다. 데 리마? 아마도 세인의 기억 세포에서 지워졌거나 가물거리겠지만 지난 여름 아테네 올림픽에서 3등을 차지한 브라질의 마라톤 선수 말이다. 그는 42.195㎞ 코스에서 37㎞ 지점까지 선두로 달리다가 한 종말론 광신도에게 떠밀려 넘어지면서 우승을 놓쳤다. 그래서 10초가량 손해를 보았다지만 그런 이변 후에 본래의 페이스를 되찾기는 거의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300m 뒤에 따라오던 이탈리아 선수에게 처지고 말았던 것이다.

*** 살생부 기준은 국제 경쟁력

올림픽 마라톤의 금메달이 어떤 것인데, 정말 이렇게 분하고 억울할 데가 없을 터다. 세계화 노도가 지구촌을 휩쓸면서 1등이냐 아니냐만이 판단 기준이 돼 버렸다. 한시도 눈을 팔 수 없는 약육강식의 세계 경쟁에서 2등은 곧 낙오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 험한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산업.무역.기술(ITT)에서 항상 1위를 지향하고 분투해야 한다. 현대의 살생부는 딴것이 아니라 바로 먹고살기 위한 경쟁력이기 때문이다. 이 살벌한 시대 정신에 비춰본다면 리마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빼앗긴 금메달을 도로 찾아야 옳다.

대회 본부(IOC)에 제의한 공동 우승 요구가 거부되자 브라질 선수단은 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 제소하겠다며 발끈했다. 그러나 리마 본인은 폐막 뒤의 기자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 일이 없었으면 우승했을 것으로 생각합니까."

"그것은 알 수 없지요. 어쨌든 레이스를 마치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올림픽 정신에 입각해 자신을 극복하고, 조국 브라질에 메달을 바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번 일로 누가 비난받아야 합니까."

"누구도 안 됩니다. 올림픽은 훌륭하게 치러졌고, 이런 일은 어디에서나 생길 수 있습니다. 다만 나 같은 선수가 또 나오지 않도록 어떤 조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게 성인인가 멍청이인가?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자. 만약 그가 자신이 1등이라고 계속 악악댔다면 그 장면을 시청한 수억명의 세계 시민에게 그저 안됐다는 동정은 받았을망정 내가 느낀 바와 같은 잔잔한 감동을 던지기는 어려웠으리라. 금메달 대신 그는 '페어 플레이'의 귀감이 될 만한 선수에게 주는 쿠베르탱 메달을 받았다.

연말에 자꾸 이 대목이 생각나는 것은 우리 정치의 매듭을 이렇게 풀어볼 수는 없겠느냐는 조바심 때문일지 모르겠다. 일례로 국가보안법 현안만 해도 그렇다. 이 법에 관한 한 따질 문제는 거의 다 따졌고, 짚어볼 사항은 거의 다 짚어보았으며, 상대방 작전에 담긴 고의와 과장까지도 훤히 꿰뚫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까지의 논의와 논쟁으로도 충분히 익었으니 앞으로 꼭지 따는 일만 남았다.

여기 폐기든, 개정이든, 보완이든 여야 합의라는 '절차'가 중요하다. 애초에 온갖 무리와 억지 속에 태어났고, 생전에도 숱한 탈선과 폭거로 원성을 샀다면, 이제 "낡은 유물을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낼" 때나마 한점 후환을 남기지 않는 페어 플레이 절차가 중요하다. 여야 대치 못지 않은 여당 내부의 진통에 노무현 대통령은 "보안법을 비롯한 4대 입법안은 여유를 갖고 대화를 통해 차근차근 풀어가자"고 했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 '여유' 언급을 반갑게 생각한다. 대통령이 거푸 다짐한 내년도의 '경제 올인'을 위해서라도 이기지 않으면 끝장이라는 식의 '정치 투쟁 올인'에서 한 걸음 비켜서는 여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 금메달보다 값진 쿠베르탱 메달

그러고 보니 이 연말 내게 기억할 일이 또 있다. 올해 아주 많이 아팠던 사우들을 위해 사내의 한 간부가 위로연을 베풀어준 것이다. 망년회다 송년회다 여러 모임이 있지만 이것은 병자나 병자 때문에 힘들었던 부부를 초대한 이색적인 자리였다. 아내와 아들의 중한 수술로 애간장이 녹은 남편도 있고, 중병이래서 개복을 해보니 오진이라 벼랑 끝에서 한숨 돌린 아내도 계셨다. 우등은 고사하고 '낙오 위험 소지자'여서 그 초대의 의미가 더 진하게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1등이 아니어서 세월이 서럽더라도 우리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새해를 맞자.

정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