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1. 샛강<6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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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두 번째의 저녁이 되자 호식이와 정삼이가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집에 얘기를 하지 않고 나왔으니 지금 들어가도 되게 혼날 거라고 풀이 죽어서 말했고, 나도 은근히 아이들이 모두 지금쯤 돌아가자고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국원이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들어가나 내일 들어가나 혼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오늘 들어가면 뒈지게 야단맞고, 저녁 굶고, 자고 일어나서도 며칠 동안 온 식구의 괄시를 받아야 한다. 내일 저녁 때쯤에 슬슬 기어 들어가면 식구들이 걱정을 하다 못해 지쳐서 반가워하는 분위기로 변할 것이다. 그러면 싹싹 빌고, 좀 심하게 나오면 또 집을 나가버리겠다고 오히려 세게 나가야 한다. 듣고 보니 그럴 듯했다. 하긴, 모두들 마음 속으로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이 자유롭고 멋진 날이 하루에 끝난다는 건 너무도 아쉬웠다.

이튿날 황혼 무렵에 우리는 분교 정문 앞에서 헤어졌다. 나는 꾸려갔던 담요며 우비와 그물을 옆구리에 끼고 되도록 천천히 집으로 걸어갔다. 호식이는 아마도 저희 형에게 죽지 않을 정도로 맞을 것이다. 그 애 형수가 더욱 혼이 나야 한다고 옆에서 거드는 소리를 담 너머로 여러 번 들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국원이와 좀 더 있다가 형이 잠든 사이에 살그머니 들어갈 모양이었다. 나는 먼저 뒤란 쪽 판자 울타리에 기대서서 집안의 동정을 살폈다. 부엌에서 일하는 누나가 밥 짓는 듯한 기척이 들렸고 마당에는 아무도 나와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현관으로 들어섰다. 현관 앞의 저희 방 마루에 앉았던 누나가 놀란 눈으로 나를 보더니 어머니를 불렀다. 다행히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 아래 위를 한번 쓱 훑어 보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 그거 내려놓구 나하구 나가자.

어디 갔었느냐, 누구와 갔느냐,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어머니가 내 손을 그러쥐더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너 학교 다니기도 싫고, 공부하기도 싫고, 집도 싫지?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둑 위로 올라가 -지금은 여의도에서 영등포 로터리 쪽으로 나가는 다리가 놓여 있는- 미군 공병대가 놓은 나무다리 아래를 지나 언덕 위에 벽돌집이 있는 '귀신바위' 쪽으로 갔다.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지진 않았지만 하늘 저 끄트머리에 노을의 자잘한 띠가 남아 있고 별이 보이기 시작한 그런 무렵이었다. 어머니가 내 손목을 이끌고 옷을 입은 채 강물 속으로 걸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차라리 나하구 강물에 빠져 죽자!

'귀신바위' 부근은 전에 오랫동안 모래를 채취한 곳이어서 물속에 숨어 있는 웅덩이가 많았다. 헤엄에 익숙한 동네 아이들도 거기서는 잘 놀지 않았다. 수초가 많았고, 한 해에 한두 차례씩 익사 사고가 났기 때문이었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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