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총장 뽑기 직선제가 최선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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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지난달 기자는 학술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충남의 한 대학을 찾았다. 모인 사람이 많지는 않았으나 흥미있는 토론을 들을 수 있었다.

오랜 만에 만난 학자들은 남은 얘기를 하기 위해 식당을 찾았다. 하지만 웬만한 식당은 이미 모두 예약이 돼 있어 갈 곳이 없었다. 그 대학 총장 선거를 앞두고 후보 교수들이 유권자 교수들을 접대하기 위해 미리 자리를 잡아놓은 것이다.

총장 선거를 둘러싼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번 달 20일 총장을 뽑기로 한 서울대 교수들도 요즘 골치가 아프다. 총장이 중도 사퇴한 이후 적지 않은 교수들이 강의나 연구보다 이 문제에 시간을 더 뺏기고 있다. 고려대도 재단과 교수협의회가 각기 선출한 총장을 놓고 충돌했었다.

대학들에서도 유사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선거가 과연 대학이 요구하는 총장을 뽑는 적절한 방식인가에 근본적인 회의가 제기될 정도다.

우리 사회에서 직선제는 곧 민주주의 실현으로 인식돼 왔다.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았던 권위주의 아래서 직선제는 국민의 직접적인 선택을 보장한다는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게 사실이다. 나아가 선거를 사회의 모든 부분에 도입하는 것이 민주적 사회로 나아가는 필수적 과정이라고 이해하기도 했다. 총장선거도 재단의 전횡으로부터 교수들의 결정권을 보호한다는 의미에서 학내 민주주의의 중요한 진전으로 해석됐다.

그러나 이제 '직선제가 곧 민주화'라는 단순한 인식이 얼마나 낭만적이었는가가 입증됐다. 최근 몇차례 시행한 직선제가 3金씨의 정략에 볼모가 돼 오히려 지역주의를 심화하거나 새로운 세력의 정치적 진출을 막아왔다는 지적도 있다. 민주화의 이름으로 시행한 지자체 선거 또한 지역 기득권층들의 부패를 정당화하는 기제가 됐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요컨대 참여자의 높은 정치의식 없이는 선거가 민주주의의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선거의 한계를 지적하는 이론은 수없이 많다. 선거가 민심의 바로미터이기 보다 체제순응을 강제하는 제도일 뿐이라는 비판이나 다수결의 원리가 소수자를 배제한다는 지적도 그에 속한다.

1972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케네스 애로교수는 민주사회에서 다수결에 입각한 선거가 결국 1인(이를 '독재자'로 표현했다)에 의한 결정임을 논리적·수리적으로 증명해 내기도 했다.

비록 선거가 민주주의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거 이외에 더 나은 대안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대신 그 방법이 제대로 작동되기 위해서는 참여자들의 높은 지적·도덕적 판단이 요구된다. 우리의 경험이 보여주듯 왜곡된 욕망·증오는 가장 민주적 제도인 선거마저 기형적 결과를 낳게 한다.

이런 점에서 대학교수들은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믿었다. 지식이 도덕성을 보장할 것이란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학총장 선거에도 지연·학벌·소속 단과대학 등 연고가 강력하게 작용했고, 후보들의 인기 영합적인 정책으로 대학은 망가져 갔다.

이런데도 대학이 직선제에 매달리는 것은 그들의 지적 능력 부재를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다. 이제 대학도 스스로에게 필요하고도 적합한 총장을 뽑는 새로운 방식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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