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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59> 제102화 고쟁이를 란제리로 : 8. 乳間·乳長의 비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사장님,큰일났습니다."

영업 책임자의 표정은 심각했다.

"브래지어가 안팔립니다."

1960년대 중반 신제품을 시장에 내놓은 지 얼마 안됐을 때였다.

서울 명동 직매장은 물론이고 백화점 매장에서도 소비자에게 외면당하고 있다는 보고였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선진국의 패션가를 직접 돌며 수첩에 그려온 디자인을 참고해 만든 '작품'이 아닌가. 최신 패션 상품이어서 불티나게 팔릴 것으로 예상했던 나의 기대는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사장님께서 파리에서 가져온 샘플에 충실하게 만들었는데…."

디자이너도 풀이 죽어 있었다.

"한국 여성들이 촌스러워서 그러는 거 아냐?"

나는 일단 국내 소비자들을 탓했다. 파리 여성들이 입는 브래지어의 진가를 깨닫지 못해 생긴 일시적 현상일 것이라며 직원들을 위로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상했다.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내야 했다.

당시로서는 우리나라 여성들의 체형에 관한 자료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여성들에게 드러내놓고 체형을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가슴에 관한 얘기를 입에 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일단 제가 입어보겠습니다."

디자이너가 스스로 입어보고 문제점을 찾겠다고 나섰다. 사무실 직원들에게도 착용시켜 소감을 알아보기로 했다.

"브래지어 컵이 가슴에 딱 맞지 않아요."

"컵이 가슴 바깥쪽으로 나가서 가슴이 불편해요."

"어깨끈이 너무 길어 자꾸 흘러내려요."

"브라 컵이 힘이 없어 가슴을 받쳐주지 못해요."

직원들의 반응은 다양했지만 문제의 핵심은 컵의 위치와 어깨끈의 길이였다. 동양 여성과 서양 여성의 가슴이 생김새부터 다르다는 점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서양 디자인을 무턱대고 베끼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서양 여성은 동양 여성에 비해 유간(乳間)이 넓고 유장(乳長)이 길다. 당연히 브래지어의 생김새도 달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가슴 따로 컵 따로' 사고가 생겼던 것이다.

당시에는 브래지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여성이 많았고, 가슴 사이즈를 재는 방법이나 브래지어 착용 방법에 관해서도 뚜렷한 기준이 없었다. 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부끄러운 일이었고 어색해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산업자원부 기술표준원에서 한국인들의 체형을 조사해 자료를 내놓고 있어 우리 같은 의류회사들이 규격화된 옷을 만들 때 참고로 삼고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같은 자료들이 없었다.

'한국 여성의 가슴은 유간이 좁고 유장이 짧다'.

이 단순명료한 '진리'를 몰라 입은 손실은 엄청났다. 실패한 제품들을 매장에서 모두 수거해 폐기처분했다. 디자이너실은 울음바다가 됐고 나도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우리에게 비용보다 더 큰 교훈을 줬다. 그 뒤로 우리 제품은 확연히 달라졌다. 한국 여성들의 좁은 유간에 맞춰 브래지어의 컵 사이를 좁혔고 짧은 유장에 맞춰 어깨끈의 길이도 줄였다. 가슴을 완전히 감싸면서 훨씬 편한 브래지어를 만들어 나갔다.

완제품을 만든 뒤 테스트하는 일도 간단치 않았다. 브래지어를 실제로 착용한 느낌을 들어야 하는데 적임자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요즘에는 속옷을 입어보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모델들이 있다. 피팅(fitting) 모델이라고 해서 우리 회사에도 일곱 명을 두고 있다. 피팅 모델들은 브래지어 사이즈로 보면 75A컵에서부터 E컵·G컵에 이르기까지 체형이 다양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전문모델은 커녕 착용 소감을 공개적으로 얘기할 여성마저 구할 수 없었다. 나는 가까운 곳의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회사 디자이너와 직원은 물론이고 직원 가족들까지 동원됐다. 신제품이 나오면 집에 가져가 부인에게 입혀보고 다음날 착용감을 기록해 제출토록 했다. 이들 덕에 우리는 한국 여성의 체형에 맞는 브래지어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됐다.

정리=이종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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