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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그때 오늘

보부상 단체인 황국협회, 독립협회를 무력으로 진압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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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독립협회가 세운 독립관에 모인 이 땅 최초의 촛불들은 국민국가 수립을 꿈꾸었다. 한 국가가 국민국가인지는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들에 의해 판정된다. 우리의 자주권을 부정한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 7)과 영일동맹(1905. 8). 그리고 고종이 거처한 경운궁이 러시아·미국·영국 대사관 옆이었다는 사실도 대한제국이 모래 위에 세운 누각이었음을 웅변한다.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키려 했지만, 러시아는 삼국간섭(1895. 4)과 아관파천(1896. 2)으로 판세를 뒤엎어 버렸다. 친일개화파는 몰락하고, 친러·친미의 정동파 내각이 들어서고 고문관은 러시아인들로 교체됐으며, 러시아어 학교와 한로은행도 세워졌다. ‘나봇의 포도원’이 되어 버린 이 땅은 열강의 ‘즐거운 이권 사냥터(happy hunting ground for concessionaries)’로 전락하고 말았다.

당시 이 땅의 사람들에게 부여된 시대적 과제는 외세의 침략을 막고 국민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이 역사적 소명을 자임하고 나선 이들이 1896년 7월 2일에 창립된 독립협회 세력이었다. 그들은 모든 인간이 동등하다는 민권사상, 황제까지도 법에 따라야 한다는 법치주의, 국가의 자주와 독립을 꿈꾸는 주권 수호사상을 품고 있었다. 이들의 활동으로 1897년 2월 고종도 러시아 공사관 생활을 접고 경운궁으로 돌아왔으며, 그해 8월에는 조선이 더 이상 중국의 속국이 아닌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임을 만천하에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이 황제의 신민(臣民)으로 살려 하지 않았음은 이듬해 3월부터 11월까지 종로 네거리 등 서울 도심에서 간헐적으로 펼쳐진 만민공동회가 웅변한다. 외세에 기대 명맥을 이으려는 왕조의 유약함은 역사의 무대 전면에 새로이 등장한 독립협회 세력에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이들의 투쟁으로 러시아 고문관들이 물러나고 한로은행도 문을 닫았다.

“나라를 문명부강하게 하는 도리는 황실을 존중하고 군주에게 충성하는 큰 뜻을 밝히는 데 있다.” 1898년 7월 7일 황태자가 희사한 천원을 자금으로 발족한 보부상 단체인 황국협회(皇國協會)는 그해 11월 독립협회의 관민공동회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길 바란 이들의 꿈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 그날.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는 일기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적었다. “오늘의 관보는 독립협회의 해산과 헌의(獻議) 6조에 서명한 대신들을 면관시킨 칙령을 공포하였다. 이것이 국왕이라니! 거짓말을 능사로 하는 배신적인 어떤 비겁자라도 대한(大韓)의 대황제 보다 더 천박한 일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정부는 친일 노예 유기환과 친러 노비 조병식의 수중에 있다. 러시아인들과 일본인 양자가 이 사건에 개입하여 의심할 여지 없이 모종의 살찐 이권을 위하여 그들의 노예를 지원하고 있다(『윤치호일기』1898. 11. 5).” 국민의 힘이 아닌 외세에 기대 왕조를 지키려 한 대한제국 황제는 채 10년이 못 되어 국권을 앗기고 말았다. 한 세기 전 망국의 슬픈 역사가 우리가 함께 져야 할 대속(代贖)의 십자가로 다가오는 오늘이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