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 대담 - 2004년을 말한다] <중> 문부식 VS 박명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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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념 대립으로 갈라진 한국 사회는 어디로 갈 것인가. 2004년 한국의 분열상을 되돌아 보고 사회 통합 방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문부식 '당대비평'편집위원(左)과 박명림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신동연 기자

한국 사회의 이념갈등은 2004년에도 여전했습니다. 오히려 어느 해보다도 첨예해지고 증폭된 면도 있습니다. 문부식(계간 '당대비평'편집위원).박명림(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두 40대 지식인이 한국사회의 분열상을 진단하기 위해 머리를 맞댔습니다. 좌우 이념대립, 빈부갈등, 민족주의, 그리고 북한과 미국을 보는 시각 등이 도마에 올랐습니다.

▶박명림 교수=여러 면에서 갈등이 많았던 한 해였습니다. 해방 후 한국은 좌우대립, 민주주의-권위주의, 지역갈등이라는 세 번의 큰 갈등구조를 겪어왔습니다. 지역대결을 지나면 민주적 정책경쟁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그게 아니었지요. 정치.언론.교육.노사 등 모든 영역이 두 이념, 두 집회로 쪼개졌어요. 민주주의는 다른 생각 사이의 대화에 바탕한 생활양식인데, 두 진영 간에 상대를 '친북 좌파''수구 꼴통'으로 낙인찍으며 대화가 단절돼 답답했습니다.

▶문부식 편집위원=이념 대립의 쌍방이 서로를 과잉 비방하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적대적 공생관계'를 형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듭니다. 사회적 이해나 실체와도 괴리된 일종의 사이비 갈등구조라 할 수 있지요. 이전의 어떤 민간 정부보다 조건이 좋았는데도 이른바 개혁 진영은 개혁의 실질적 내용을 채우지 못하는 것을 반대 진영의 공세 탓으로 돌렸어요. 이는 '세습화된 희생자 의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증거입니다. 반면 냉전적 가치에 집착하는 보수 진영은 대안을 내놓지 못하면서 국가건설의 주역이란 옛 추억에 매달려 정체성 논쟁에 안주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박명림=노무현 정부의 기조는 자유주의와 중도진보의 혼합인데 중산층이나 노동자층과의 연대가 허약한 상황에서, 실제 개혁성과로 이어지지 않는 도덕적 담론을 반복하자 국민 지지가 떨어졌습니다. 보수세력은 주요 개혁정책들에 대해 끊임없이 '좌파'라는 이념적 낙인을 찍으려 했고요. 이념대립이 격화되면 인간.삶.정책내용은 사라지고 흑백논리의 틀에 갇히게 됩니다. 특히 정당과 언론은 사회통합의 두 핵심 기제인데 우리 사회에선 거꾸로 이곳에서 갈등이 증폭됩니다. 언론은 이제 국민통합기제가 아니라 권력과 이념갈등의 주체가 돼버렸어요.

▶문부식=정치권 밖에서도 갈등을 조장한 측면이 있습니다. 예컨대 TV 토론회 같은 것을 보면 좌석 배치부터 철저한 이분법에 기초합니다. 대립 항 사이에 놓인 복합적인 사유의 가능성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이지요. '이철우 의원 간첩혐의 공방'이 정치권 안에서 벌어진 극우파적 마녀사냥이었다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이영훈(서울대 경제사)교수의 발언을 둘러싼 논란은 친일파 청산의 구호 아래 이루어진 시민사회의 '민족의 적'(반역자) 만들기에 다름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박명림=정부는 이제 도덕과 열정의 정치를 넘어 책임 있고 사려 깊은 정치를 해야 합니다. 또한 개혁 의제를 일거에 해결하려는 총체적 접근이 아니라 부분적 방식의 미덕을 배워야 합니다. 보수세력은 건국과 산업화 논리로 이념공세를 지속해서는 희망이 없습니다. 냉전적 기득세력에서 탈냉전적 보수세력으로 거듭날 수 있느냐에 그들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문부식=보수 진영이 냉전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면, 개혁 진영은 민주주의를 섭리적으로 생각하며 자신들이 그 섭리를 실현시켰다는 도덕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어요. 포퓰리즘에 편승해온 지식인 사회도 반성해야 합니다.

▶박명림=빈부 갈등도 심각합니다. '민주화 이후 왜 되레 사회양극화와 빈부격차가 심화되는가'는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화두입니다. 그런데도 현 정부가 실제로 분배정책을 편 것은 거의 없어요. 서구학자들도 동의하듯 이승만.박정희 정부 초기의 분배지향적 정책은 한국 경제발전의 토대가 됐습니다. 즉 한국에서 성장과 분배는 상충적이지 않고 상보적입니다. 또 빈곤계층을 포용하지 않고 선진국으로 발전한 사례는 거의 없습니다. 고르고 넉넉한 사회를 위한 한국적 사회통합모델이 시급합니다.

▶문부식=1997년 이후 민주화 과정의 역설적 현실은 고통받는 자들이 더 고통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도 개혁 등이 요란하게 이야기되는 동안 사회적 양극화는 수습이 어려울 만큼 심화돼 왔습니다. 국가보안법은 인권적 차원에서도 마땅히 폐지해야 하지만 정부가 이 문제에 과도하게 매달리는 것은 빈곤과 실업 같은 문제를 대면하지 않거나 무능함을 감추려는 의도적 시간벌기로까지 보여요. 민주 정부에서는 '인간 안보' 문제가 가장 다급한 것 아닌가요.

▶박명림=북한에 대해 얘기해 볼까요. 북한에서 벌어지는 인권.기아.핵 문제는 명백히 시대착오적입니다. 반공적 시각으로만 북한을 보는 것도 문제지만, 개혁진영이 북한 문제를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우리 사회와 정부는 이제 북한의 인권.기아.핵 문제를 결합한 포괄적 대구상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북한문제를 또한 동아시아 및 국제문제로 접근하는 탈한국적.탈민족적 발상도 필요합니다.

▶문부식=북한 인권 문제는 사실 우파보다 좌파가 먼저 제기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북한의 일본인 납치는 전시도 아닌 상황에서 벌어진 명백한 국가 테러입니다. 이를 일본 좌파.진보파들이 지금까지 비판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어요. 결국 '가짜 유골'사태까지 벌어지면서 일본 사회가 우경화하는 재료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좌파가 지급해야 할 일종의 역사의 외상값입니다. 북한의 인권 문제는 정부보다는 시민사회가 적극적으로 거론할 필요가 있고 이것이 실질적 압박이 될 때 오히려 정부의 협상력도 높아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올해 학계에서는 '민족주의 비판'도 큰 논쟁거리였죠.

▶박명림=그 문제는 문 선생님도 많은 고민을 해온 걸로 알고 있는데요.

▶문부식=저는 박정희 정권의 조국 근대화 논리가 다른 민주주의적 가치를 압살시켰고, 북한식 우리 민족 제일주의는 체제의 비합리성을 은폐하고 있다고 봅니다. 민족주의가 국민을 동원하는 최상의 이데올로기적 위치를 점하게 되면 그 밖의 다양한 가치를 섬세하게 보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좌파 혹은 개혁파가 북한의 인권 문제에 침묵해 왔던 것도 결국 민족 대단결 논리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지요. 2005년이 해방 60주년이다 뭐다 해서 남북 간의 이벤트들이 기획되고 있을 텐데, 민족이니 통일이니 하는 말들이 또다시 절대적 무비판의 영역으로 들어갈까봐 걱정입니다. 지식 사회에선 다소 앞서 가더라도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작업들이 요구되는 시점이라 생각합니다.

▶박명림=제 생각은 약간 다른데요. 한반도의 지정학적 조건과 역사를 보면 민족주의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민주주의.평화.통일 등에 대한 자기 사고체계를 갖긴 힘들어요. 그것은 연대와 발전의 동력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민족주의는 타자의 인권을 억압하고 민족을 고립시킬 수 있는 양날의 칼입니다. 따라서 민족주의는 안으론 민주주의와, 밖으론 보편주의와 만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으론 독재로, 밖으론 자폐적 고립으로 연결되고 말겠지요. 이 문제는 미국에 대한 시각과도 연결되는데요, 한.미 간 갈등을 너무 두렵게 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이승만.박정희 정권 때도 휴전.원조.주한미군.선거 등을 놓고 갈등이 심각했어요. 양국의 국익은 같지 않죠. 중요한 것은 '친미.반미'나 '친북=반미, 친미=반북'의 양분법을 넘어 '동맹을 통한 자주''협력을 통한 주체'등 복합적 발상이겠지요.

▶문부식=친미와 반미의 공통점은 미국 중심주의라는 것입니다. 바깥을 기준으로 우리를 바라본 일종의 근대적 콤플렉스입니다. 미국은 여전히 우리에게 대등한 응시의 대상이 아니라 벅찬 애증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것이지요. 반미나 친미를 체화한 사람들에게 미국은 하나의 이미지로 존재할지 몰라도 미국 역시 여러 모순된 가치로 이루어진 여러 개의 미국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바탕에서 단절이나 기존의 불평등의 고수가 아니라 다른 공존의 방식을 협의해 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문부식.박명림=오랜 시간 수고하셨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정리=배영대 기자

사진=신동연 기자 <sdy11@joongang.co.kr>

*** 문부식(45) 위원은

계간 '당대비평' 편집위원이자 시인.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1982년)으로 제도권에선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운동권에선 한동안 '반미의 상징'으로 통했다. 2002년 펴낸 에세이집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광기의 시대를 생각함'(삼인)은 그를 다시 태어나게 했다. 82년의 사건에 대해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방화였다"고 참회하면서 민주화세력의 과거사에 대한 자기 성찰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시집으로는 '꽃들'(푸른숲, 1993년)이 있다.

*** 박명림(41) 교수는

1996년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나남)을 펴내 일찍부터 주목을 받은 386세대 정치학자.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브루스 커밍스(미 시카고대 교수)의 유명한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이 제기한 '좌파적 수정주의'(남침 유도설)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북한의 남침을 입증하면서 국제전의 시각을 도입한 것이다. '한국 1950:전쟁과 평화'(나남, 2002년)로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최연소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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