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응원 맞대결 무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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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한나라당 이회창(會昌)후보와 민주당 노무현(武鉉)후보가 한국-폴란드전 응원을 둘러싸고 부산에서 날카로운 신경전을 펼쳤다. 부산역 광장에서의 전광판 응원을 놓고서다.

먼저 자리를 잡은 쪽은 이회창 후보다. 한나라당은 5월 31일 "후보가 부산역 광장에서 '붉은 악마'와 함께 대형 전광판을 보며 한국 대 폴란드전을 응원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비슷한 시점에 민주당은 "노무현 후보는 부산 월드컵 경기장에서 관전할 것"이라고 밝혔다.

상황은 4일 오전 민주당이 "후보가 부산역 광장에서 월드컵 응원전을 펼 것"이라고 돌연 발표하면서 꼬이기 시작했다. 후보는 장소 변경의 이유를 "국가적 대사 앞에선 마음을 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며 "오늘만큼은 휴전을 선포하고 정치행위를 중지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나라당과 후보측은 후보의 설명을 액면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무성(金武星)후보비서실장은 "굳이 우리와 함께 경기를 보겠다는 속뜻은 싸움을 걸겠다는 것 아니냐"며 의구심을 드러냈다.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의 소집령도 한나라당을 자극했다. 노사모 대표인 명계남씨는 이날 오전 10시쯤 회원들에게 부산역으로 집결하라는 인터넷 고지문을 띄웠다. 여기엔 '오늘저녁 노짱(노무현 후보)님과 우리는 모두 붉은 악마가 됩니다. 이회창씨도 현장에 참여할 예정입니다. 열띤(?) 응원전이 벌어질 겁니다. 현장에 오시면 깜짝 놀랄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라고 적혀 있다.

한나라당 남경필(南景弼)대변인은 '깜짝 놀랄 이벤트'에 대해 "후보가 하도 튀는 행동과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을 해 (계획을 변경한)의도를 의심했는데 노사모를 붉은 악마화해서 나쁜 정치적 행사를 기획하는 게 아니냐"고 비난했다. 한나라당 부산선대위는 "스포츠를 정쟁화하려는 얄팍한 꼼수"라고 주장했다.

후보측은 대책을 논의한 끝에 응원전 장소를 부산역 광장에서 해운대로 바꿨다. 해운대 백사장에도 대형스크린이 설치됐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이상호 부산지역 노사모회장은 "후보가 노사모 번개(미리 계획되지 않은 즉석 미팅)현장에 오는 것 자체가 깜짝 이벤트였다"며 한나라당의 의구심을 반박했다.

결국 이날의 소동은 선거를 '부패정권 심판'구도로 몰려는 한나라당과,'노무현-이회창 대결'로 전환하려는 민주당의 엇갈린 계산 때문에 빚어졌다는 지적이다. 동시에 정치권에는 '월드컵을 정략적으로 이용한다'는 따가운 비난이 더해질 전망이다.

강민석, 부산=김정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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