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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축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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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리고 있는 2010 월드컵 8강에는 브라질·우루과이·아르헨티나·파라과이 등 남미 국가가 4팀이나 포함됐다. 남미 대표 5개국 중 칠레를 제외한 네 나라가 8강까지 살아남은 것도 놀랍지만, 이들 4개국이 100여 년 전 수십만의 희생자를 낳은 전쟁의 유산을 공유한 사이라는 게 더욱 이채롭다.

1864년, ‘남미의 나폴레옹’을 자처하던 파라과이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는 우루과이 내정에 간섭하다 브라질과 갈등을 빚었고, 결국 파라과이의 선제 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됐다. 잘 준비돼 있었던 파라과이군은 개전 초 브라질의 남부 2개 주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리지만, 로페스 정권의 외교 부재로 전쟁은 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의 3국 동맹과 파라과이의 3대 1 싸움으로 번졌다.

결국 1869년 파라과이의 수도 아순시온이 동맹군에 의해 함락되고, 1870년 게릴라전을 펼치던 로페스가 사살되면서 전쟁은 막을 내렸다. 무모한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3국 동맹군의 사망자도 8만 명에 달했지만 파라과이는 전쟁 전 52만 명이던 인구가 22만 명으로 감소했다. 살아남은 남성 인구가 총 2만8000여 명뿐이었다니 아예 나라의 대가 끊길 위기였던 셈이다. 지금도 전쟁을 방불케 하는 남미 지역 국가 대항전의 열기를 보면 이런 과거사의 앙금이 축구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축구로 재현되는 역사의 앙금은 멀리 갈 것도 없이 한·일전이 가장 좋은 예다. 맞대결 때마다 열을 올리던 양국 축구 팬들은 이번 월드컵에선 과연 어느 쪽이 더 좋은 성적을 내느냐를 놓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한국이 16강에서 멈춘 뒤, 파라과이가 일본의 8강 진출을 저지하자 주한 파라과이 대사관 홈페이지가 한·일 양국 네티즌의 설전으로 다운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미국의 인류학자 리처드 사이프스는 1973년 “축구와 같은 스포츠는 갈등 주체 간의 공격적 긴장을 해소시켜 전쟁의 대안으로 기능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어차피 존재하는 갈등이라면 전쟁보다는 축구로 해소하는 것이 낫다 싶지만, 1969년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는 오히려 월드컵 축구 예선의 과열로 인해 진짜 전쟁(‘축구 전쟁’이라고 불린다)을 벌이기도 했다. 역시 뭐든 지나치면 부족한 것만 못하다는 성현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새겨보게 된다.

송원섭 JES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