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중국은 기회… 구조조정 불가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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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지난달 17일 고이즈미 총리가 도쿄 오타구공단을 찾았다. 기타지마시보리 제작소와 잉크스 등 중소기업 두 곳에 들렀다. 기타지마시보리 제작소에선 직접 제품을 만들었고 선물로 받아 갔다. 총리는 공장 문을 나서면서 "큰 힘을 얻었다"며 흐뭇해 했다.

이틀 뒤 같은 공단 산업회관,전국 중소기업 공단 대표 35명이 모였다.

"총리가 잘 나가는 기업만 보고 갔다. 그러니 여태 대책이 안 나오지…."

너나 없이 대기업의 중국행 바람에 쓰러지는 중소 하청업체를 걱정했다. 일거리가 줄어듦은 물론 중소기업이 힘들여 만든 설계도를 대기업들이 외국으로 빼돌려 싸게 부품을 만드는 행위까지 저지른다고 성토했다."기술(디지털)이 존재하려면 기능(아날로그)이 필수"라며 정부에 대책을 촉구했다. 이 비상대책회의에 참석한 기업 대표를 포함한 중소기업 관계자 25명이 '이럴 바엔 우리도 옮기자'며 이미 한달 전 공동 실태조사를 위해 중국에 다녀왔다.

대기업을 중심으로 1970년대부터 시작된 해외 진출은 초기에는 수출을 늘리기 위해 생산시설을 일부 옮기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높은 인건비와 생산비용을 견디다 못해 '탈출'하는 것으로 차원이 다르며, 중견·중소기업까지 이 대열에 끼였다. 언제 금융 부실의 불똥이 튈지 모르고, 주변 국가의 기술·인력 수준이 높아진 점도 공동화를 부채질하고 있다. 태국·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등 동남아로 나갔던 기업들이 요즘은 중국으로, 중국으로 달려가고 있다.

몇년 전까진 중국을 경계하다가, 이제는 시장과 기회로 보고 뛰어든다. 힘깨나 쓰는 기업들은 '생산은 중국, 연구개발은 일본에서'해오다 지난해부턴 연구개발도 중국 현지로 바꿨다.

혼다는 중국 합작사에서 만든 50㏄ 스쿠터를 일본에 들여와 판다. 국내에서 채산이 맞지 않자 중국을 생산기지로 택한 것. 지난해 사상 최대 순익을 올린 닛산도 중국과 자동차를 합작 생산하기 위해 협상을 진행 중이다. 지금은 2륜 스쿠터를 들여와 파는 정도지만 언제 중국에서 만든 4륜 자동차가 낮은 가격을 무기로 들어올 지 모른다.

컬러TV는 이미 90% 이상이 해외로 이전했다. 가전제품의 중국 생산 비중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후지쓰는 주력인 에어컨의 국내 생산을 접고 중국 상하이와 태국 등 해외생산으로 바꿨다.

지난 17일 중국 최대 가전업체 하이얼의 제품이 일본에 들어왔다. 산요전기와 제휴해 설립한 산요하이얼이 활동을 개시한 것. 산요도 하이얼 판매망을 활용해 산요 제품을 중국에서 팔기로 했지만, 냉장고와 세탁기 등 제품이 충돌한다.

그럼에도 산요가 하이얼의 일본 진출을 도운 것은 중국이 따라오기 힘든 첨단제품 개발에 매진하도록 회사 분위기를 바꾸려는 경영진의 계산도 숨어 있다. 마쓰시타도 지난달 중국의 대형 가전 메이커 TCL과 제휴 협상에 들어갔다.

지난해 공산품과 섬유류 등 일본의 완제품 수입액은 2천1백57억달러(전체 수입의 61.4%). 드디어 중국(4백88억달러)이 미국(4백61억달러)을 제치고 최대 무역 상대국이 되었다. 그만큼 일본 기업이 생산거점을 중국으로 옮겨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급성장했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힘이 달리는 중소 하청업체다. 지방으로 갈수록 일감이 줄고 중국 제품에 치여 기업 도산과 실업자가 늘고 있다.

쌀의 고장인 니가타현의 소도시 미쓰케. 30년 전만 해도 1백여개 공장이 씽씽 돌아가는 직물제품의 메카였다. 기계를 한번 돌리면 만엔짜리 지폐를 만질 수 있다고 해서 '가차만'(かちゃまん·직물을 짠다와 만엔을 합친 말)이란 말이 유행했다. 그런데 4년여 전부터 상황이 돌변했다. 불황으로 물건이 안 팔리는 데다 값싼 중국산이 밀려와 업체들이 줄도산했다. 이들을 상대로 재미를 보았던 니가타중앙은행도 99년 문을 닫았다.

중앙·지방정부와 정치권·산업계 모두 산업공동화를 걱정한다. 지난해 10월 요코하마 도쿄전력 회의실. '21세기 일본 경제의 재생'을 주제로 한 토론 모임에 관내 기업가와 교수들이 모였다. 경제산업성 고위 관료의 솔직한 고백이 있었다.

"중후장대형 산업에 의존,산업구조를 바꾸지 못했다. 기업들은 '제품혁신'이 아닌 '공정혁신'에 머물렀다. 기업들이 중국으로 생산기반을 많이 옮기는 바람에 지방에선 산업공동화가 아닌 '진공화'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제 차세대 성장산업을 찾고 제품을 혁신해야 한다."

도요타·소니·마쓰시타·닛산·캐논·미쓰비시 등 대형 제조업체는 잘 나간다. 브랜드 이미지가 좋고 중국 등 해외 공장도 많다. 일본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다른 데 가서 생존할 수 있다. 이런 대기업이 잘 되는 것과 전체적인 일본 경제 상황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공동화는 경제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자 일본 기업의 글로벌 진전으로도 볼 수 있다. 서비스산업을 키워 중소 하청기업에서 나오는 실업자를 흡수해야 한다. "(오키 히로미 일본무역진흥회 계량분석팀장)

"오타구공단 등을 생명공학(BT)·나노기술(NT)·정보기술(IT)등 경쟁력있는 기업단지로 바꿔야 한다. 중국 등지의 모조품 단속도 강화하고 주변 국가로 기술이 유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호사카 신 경제산업성 경제산업정책과장보)

최근 『중국 쇼크』란 책을 쓴 센카빈 미쓰이물산 중국경제센터장은 중국 속담 '양장피단'(揚長避短·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피하라)전략을 강조한다.

"일본 기업의 장점은 기술력, 단점은 고비용이다. 일본은 부가가치가 높은 신제품을 개발하고 중국·한국 기업과 분업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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