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 박희순 ‘맨발의 꿈’ 생각하며 그가 울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21면

‘세븐데이즈’ ‘작전’ 등에서 개성적인 조연으로 자리를 굳힌 박희순(40). 그가 새 영화 ‘맨발의 꿈’을 내놓았다. 연극 경력 12년, 충무로 진출 8년 만의 첫 단독 주연작이다. 그간의 카리스마 넘치는 강렬한 연기 대신 때로는 찌질해 보일 정도의 철부지 축구감독 원광 역이다.

‘맨발의 꿈’은 엉겁결에 동티모르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치게 된 한국 감독이 그들과 함께 일궈낸 작은 기적에 대한 실화 영화. ‘동티모르의 히딩크’라 불리는 김신환 감독이 실제 모델이다.

박희순은 이 영화에서 전작들의 무게감을 가뿐히 내려놓고 편안하고 일상적인 연기를 선보인다. 현지 아이들과 뒹굴며, 한국어·영어·인도네시아어·떼뚬어 등 4개 국어를 섞어 구사하는 기상천외한 대사로 객석을 뒤집어놓는다. 그렇게 ‘박희순표 원맨쇼’를 하다가 사람 냄새 물씬 나는 감동도 전한다. 조연이지만 주연 못지 않은 존재감을 발휘해 온 박희순은 최민식·송강호·설경구·김윤석·황정민 등을 잇는 차세대 실력파 대어로 꼽힌다. 아직은 가능성에 비해 ‘한방’이 없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10억’ ‘우리 집에 왜 왔니’ 등 새로운 시도의 영화들에 출연하며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행보가 남다르다.

사진촬영을 위해 카메라 앞에 선 그는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카메라 셔텨가 요란하게 터지는 가운데, 그의 표정은 삽시간에 변해갔다. 우리가 스크린에서 미처 못 봤던, 미지의 박희순이 거기에 있었다. 우리는 아직도 이 배우를 제대로 모르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는 앞으로도 보여줄 것이 더 많은 배우, 완성체를 향해 차근차근 나아가는 진행형의 배우다.

-아까 사진 촬영하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왜?

“모르겠다. 그냥 ‘맨발의 꿈’이 처음부터 끝까지 머릿속에 지나갔다. 이 영화는 무조건 내게 짠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남극일기’(뉴질랜드), ‘10억’(호주)에 이은 세 번째 오지 영화다. ‘오지 전문배우’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렇게 어려운 촬영조건을, 비교적 싼 개런티에 감수할 배우가 나밖에 없어서 아닐까(하하). 그간 주로 강하고 센 역할만 했는데 이제는 좀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때라고 생각했다. 조금은 풀어지고, 인간 박희순이 드러날 수 있는 역할. 매 작품을 할 때 배우가 자기 연기에 질리면 관객도 질린다. 내가 새롭고 신기해야 관객도 그렇게 느낀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나 ‘시티 오브 갓’처럼 외국 아이들하고 함께 하는 영화도 해보고 싶었다.”

-말이 그렇지 외국 아이들과 촬영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더구나 동티모르에서 제작된 영화 1호라면서.

“동티모르엔 극장이 없다. 사람들이 거의 영화를 본 적이 없고. 애들한테 유일한 오락이 축구인데, 이번엔 영화촬영이 새로운 오락거리가 됐다. 처음엔 아이들이 자꾸 카메라를 쳐다봐서 스태프들이 계속 ‘카메라 보지 마'를 외쳤다.”

-아역 배우들의 연기가 아주 자연스럽다.

“직접 오디션으로 뽑았는데 대부분 유소년 축구단원들이다. 아무래도 자기들 얘기니까, 그리고 아이들은 순수하고 계산 안 하니까 성인보다 더 살아 있는 연기가 나온다.”

-아이들과 호흡을 맞추는 데도 노하우가 있을 것 같다.

“내가 원래 아이들을 좋아하는 데다 ‘헨젤과 그레텔’을 하면서 아이들하고 연기하는 노하우를 얻게 된 게 도움이 됐다. 아이들에게는 100을 얻어 내려면 상대 어른이 100이 아니라 130을 연기해야 한다. 상상치 못한 동심의 상상력으로 덕 본 장면도 여럿이다.”

-축구 경기 촬영 땐 거의 감독 역할을 했다면서.

“아, 그건 과장이고. 모든 게 나한테 맡겨져서, 주연이면 집주인처럼 대접받을 줄 알았는데 뭐야 머슴이잖아 푸념하기는 했다(웃음). 망원 촬영에 동선을 따로 체크 안 하니까 축구장에 달랑 우리만 섬처럼 떠 있는 거다. 단독샷, 풀샷, 그룹샷 등 보통 50테이크에서 100테이크까지 갔다. 초반엔 아이들을 찍는데 내가 대충대충 하면 애들이 대충대충 하니까 전념할 수밖에 없다. 나중에 내 분량 찍을 땐 정말 탈진상태인데, 슬슬 지겨워진 애들이 장난하고 훼방 놓고. 짠한 감정신이라도 있으면 죽을 지경이었다. 배우들 중 가장 진지하고 감성이 풍부한 조세핀, 투아 남매만 쳐다보면서 연기했다.”

-실제 축구를 좋아하나. 축구의 매력은 뭘까.

“가장 큰 골대에 제일 적게 골이 터지니 더욱 골을 갈망하게 되는 스포츠? 거기에 가난한 사람이건 부자건 공 하나만 있으면 20~30명이 힘을 합쳐 할 수 있는 게 축구다. 이번 영화를 위해 고등학교 축구부에 가서 축구를 배웠는데 쉽지 않더라. 학생들이 작정하고 놀렸다(웃음)."

-실존 인물이 있다. 얼마나 같고 다른가.

“원래 김신환 감독님은 호랑이 선생님이다. 엄격하고 무뚝뚝하다. 반면 난, 좀 더 인간적이고 사기성도 있고 루저에 가까운 인물로 해석했다. 김태균 감독님은 사실성이 떨어진다면서 못마땅해 하셨다. 그래서 내가 다큐를 찍는 것도 아니고 내가 재연배우도 아닌데 그렇게 못하겠다고 세게 버텼다. 나중에야 무조건 날 믿어주셨지만 여러 나라 말을 섞는 대사 ‘me가 너희들을 trust할 테니, one day, one dollar를 나한테 give money. 남숭남숭(바로바로의 현지 떼뚬어)’ 같은 대사도 싫어하셨다. 늘 시계를 보면서 ‘웃기긴 한데 길다’고 하셨다.”

-무더위 등 어려움이 많았다고 들었다.

“처음엔 축구감독치고 너무 하얗다고 생각해서 부러 태웠는데 나중엔 손톱만한 기미가 생겼다. 40도가 넘는 뙤약볕이라 머리가 다 타버려 대머리 되는 줄 알았다니까. 자릿세를 요구한 깡패들하고 실랑이 끝에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몇몇 스태프들은 얻어맞고 쓰러졌다. 나는 조세핀을 안고 미친 듯 뛰어서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 그땐 정말 촬영하다 죽는구나 싶었다. 조세핀은 그날 이후부터 나만 졸졸 따라나녔다.”

-박희순표 애드립은 여전하다. 애드립 연기의 원칙이 있다면.

“즉흥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철저히 계산한 것이다. 즉흥 애드립을 치면, 극중 역할이 아니라 인간 박희순의 18번이 나온다. 인간 박희순을 자꾸 꺼내 보이면 바닥이 빤히 보이고 관객이 금방 식상해진다. 연극 하면서 들은 말이 있다. ‘네가 가진 열 개의 구슬 중에 딱 필요한 한두 개만 풀어 써라. 나머지는 아껴라.’ 쉽게 고갈되지 말라는 뜻이다.”

-18번이라는 표현이 재밌다.

“배역을 맡으면 그 인물의 18번을 만들어 낸다. 말투·표정·행동거지·습관 등이다. 촬영이 시작되면 상황에 맞게 18번들을 꺼내 쓴다. 이걸 잘 하려면 평소 사람 관찰을 많이 해야 한다.”

-최민식·설경구·송강호·김윤석·황정민 같은 배우들을 잇는 차세대다.

“지금 말씀하신 배우들 보면 전부 연극무대 출신이고 뜨거운 연기를 하시는 분들이다. 나는 차갑고 여리고 지적인 연기로 차별화하면서 그분들과 행복하게 같이 가고 싶다. 블록버스터 상업영화에서 매니어 취향의 작은 영화까지 폭넓게 소화하는 조니 뎁이 내 롤 모델이다.”

-흥행에 대한 부담은 없나?

“아주 많다. ‘맨발의 꿈’은 순제만 28억이고, 동티모르와 오사카 등 100% 해외로케 영화다. 대중성 없는 박희순이라는 배우에, 동티모르 얘기니까 무조건 칙칙한 저예산 영화라고 단정짓지 마시길. (좋은 꿈 꿨냐는 질문에) 동티모르에서 촬영할 때 아주 강렬한 꿈을 꿨다. (내용은?) 꿈발 약해진다. 비밀이다(웃음).”

글=양성희기자 ,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시시콜콜] 박희순
조폭 연기 달인에서 오지 전문 배우로, 다음은 달콤한 로맨스물?

강렬하거나 악랄한 역할까지도 무표정하게 해내는 그를 생각하고 실제 박희순을 만나보면, 극중 이미지와 너무 달라 깜짝 놀라게 된다. 많은 인터뷰는 그가 얼마나 스타답지 않게 겸손한지에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목소리도 작고 조곤조곤 얘기했다. 남을 배려하는 게 익숙하고, 싫은 소리를 잘 못하는 사람 특유의 겸양과 소심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팝칼럼니스트 김태훈은 한 오락프로에서 ‘존재감 없던 학창 시절의 박희순’에 대해 증언했다. “박희순이 고등학교 동창이다. 심지어 3년 동안 같은 반이었다. 전혀 몰랐다. 박희순이 말해줘서 알았다.”

실제로도 그는 “어려서 성격만 보면 배우를 못했을 사람”이라고 말했다. “소심하고 나서는 걸 싫어했다. 서울 예대 연극과에 원서 내면서 친구들한테도 비밀로 했다.” 그는 “무대와 스크린은 평소 자연인 박희순이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을 하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평소에는 화도 잘 못 내지만, 연기를 통해 억눌린 것들을 발산하며 해방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하도 내성적이라 자신의 성격을 증오했던 소년 조승우가 부끄러움을 떨치기 위해 무대에 서고, 평생 모범생의 길을 걸어온 박찬욱 감독이 일탈의 욕구를 폭력미학으로 승화시킨 것과 마찬가지다.

한때 ‘조폭 연기’의 달인으로 불렸던 박희순은 이제 ‘오지 전문’ 배우를 지나, 달콤한 로맨스물을 찍고 싶다고도 말했다. 얼마 전 신세경과 함께 새 영화 ‘푸른 소금’에 출연하게 된 송강호에게 문자를 보내 “형은 전생에 무슨 착한 일을 했기에 옥빈이(‘박쥐’), 세경이랑 하느냐”고 ‘앙탈’도 떨었다.


출연작은

<연극드라마>

2001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2002 뮤지컬 ‘록키 호러 픽쳐쇼’

2005 연극 ‘클로저’

2007 KBS 드라마 ‘얼렁뚱땅 흥신소’

<영화>

2002 ‘보스 상륙작전’

2004 ‘가족’ ‘귀여워’

2005 ‘남극일기’ ‘러브토크’

2007 ‘세븐 데이즈’ ‘헨젤과 그레텔’

2008 ‘바보’ ‘나의 친구 그의 아내’

2009 ‘작전’ ‘우리 집에 왜왔니’ ‘10억’

2010 ‘맨발의 꿈’ ‘혈투’(개봉 예정)

양성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