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포르타인 추모 열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한 여성을 만날 때 항상 여자가 아닐 수 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몇 주 전 네덜란드의 한 호텔에 비치된 관광 안내 책자에 경찰이 게이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한 문구다.'금지하는 것 자체를 금지하는', 심지어 동성애와 마약에 대해서도 자유롭고 개방적인 네덜란드에선 당시 신생 극우정당 지도자 핌 포르타인의 암살로 온나라가 추도의 물결을 이뤘다. 경희대와 공동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취재하기위해 이 나라에 들른 기자는 운 좋게도 유럽의 극우 현상을 직접 목격하는 기회를 갖게 됐다.

네덜란드 시민은 17세기 이후 처음 발생한 정치인 암살사건에 적지 않게 놀라고 있었다. 암스테르담 광장에 있는 2차세계대전 참전용사 탑에는 꽃다발과 함께 '민주주의 종말'을 우려하는 메모로 가득 차있었다. 포르타인의 정치적 고향 로테르담에서는 추도 시위가 있었고, 방송은 생전의 그의 인터뷰를 연일 특집으로 내보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얼마전에 실시된 총선에서 이 정당은 대단한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다.

극우가 가장 혐오하는 동성애자이기도 한 포르타인에 대한 애도는 그 이틀 전에 들렀던 프랑스의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다. 사회당 조스팽 대신 극우정당의 르펜이 결선투표에 진출해 프랑스 지식사회는 경악하고 있었다.'좌파는 파벌 때문에 망한다'는 고전적 진리를 다시 입증하려는 듯, 조스팽의 실패는 좌파 정당의 난립 때문이었다. 프랑스 지식사회는 연일 극우지도자 르펜을 난타했다. 우리 기준에서 보면 명백히 편파 보도에 해당하는 보도·해설·토론이 방송을 메웠다. 그리고 '차악(次惡)'을 선택한 좌파의 지지로 우파인 자크 시라크는 무려 80%에 이르는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어떤 경우도 암살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파에 대한 서로 다른 태도, 특히 네덜란드의 과잉 추도 열기에 의아해하던 기자에게 암스테르담에서 만난 네덜란드인 교수의 설명은 명쾌했다.

포르타인은 우파적 방식이기는 하지만 정체된 네덜란드에 심각한 물음을 던졌다. 사회복지 국가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기존의 정치 세력과 달리 기업에 대한 세금감면, 복지축소 등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내놓았고, 특히 이슬람의 위협을 들어 애국주의를 옹호했다. 그런 정책들은 옳바름 여부를 떠나 유럽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위기감을 반영하고 있으며, 유럽 사회는 어떤 식으로든 이런 문제 제기에 대해 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암살을 관용(톨레랑스)과 다양성에 대한 폭력으로 받아들인다는 점 또한 중요하다. 여러 인종이 섞여 사는 네덜란드에선 관용과 다양성은 공존의 중요한 원칙이었으며, 이를 폭력적 방식으로 깨어버린 암살을 시민들은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관용은 유럽에서 좌파들의 논리지만, 그 적용 대상에선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관용이 유럽 좌파의 혁명적 전통 상실과 체제 적응의 결과라는 비판도 있지만,'증오의 정치'에 익숙한 우리에겐 중요한 사회윤리적 준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 우리 사회에선 과연 누가 누구에게 관용을 보여줘야 할 것인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