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19회 빅딜<上> DJ,물밑 빅딜 잘 안되자 "내각이 나서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5대그룹간 빅딜(대규모 사업교환)을 포함한 대기업 구조조정안이 이르면 며칠 뒤에 발표될 것입니다. 그동안 모 재벌 그룹이 구조조정에 거부적인 태도를 취했으나 9일 승복했습니다."

1998년 6월 10일.'대통령의 국가경영철학'을 주제로 능률협회 조찬강연 중 김중권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의 폭탄선언이 터졌다. 훗날 삼각빅딜로 일컬어진 현대-삼성-LG간 빅딜은 이렇게 엉뚱한 자리에서 엉뚱한 순간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DJ는 방미(訪美)중이었다. 때문에 비서실장인 김중권의 발언은 DJ의 의중이 담긴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기자들의 질문이 잇따르자 김중권은 손사래를 쳤다.

"구체적인 내용은 박태준 총재에게 물어보라."

그러나 빅딜을 극비리에 추진해오던 박태준(TJ)당시 자민련 총재의 반응은 냉랭했다.

"나는 빅딜은커녕 스몰딜도 모른다."

김중권은 강연 직후 즉각 TJ에게 전화를 걸어 발언 배경을 설명했지만 TJ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김중권의 회고.

"그때 朴총재가 전면 부인하지 않고 잘 대응했으면 (빅딜이) 파문 없이 잘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방미에서 돌아온 DJ도 그 점을 아쉬워했다. DJ는 '박태준 총재가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朴총재는 경제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라고 했다.'빅딜을 해야만 기업들이 산다. 그래야만 국제경쟁력이 생긴다'고 설명했어야 했는데 되레 꼬리를 빼니까 대통령이 이해를 못한 것이다."

삼각빅딜은 현대그룹이 삼성자동차를 인수하고, 삼성은 LG반도체를,LG는 현대종합화학을 가져오는 세 그룹간 사업교환을 뜻했다. 이는 외환위기 직후인 97년 말 DJ의 요청을 받고 TJ가 공들여 만든 작품이었다. 삼각빅딜은 비록 불발로 끝났지만 훗날 반도체 등 7개 업종 빅딜의 모태가 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그렇다면 삼각빅딜은 왜, 어떻게 탄생하게 된 것일까. 이를 짚어보려면 외환위기 직후 등장했던 빅딜 논의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그때 빅딜 논의의 중심에는 김원길 당시 국민회의 정책위의장이 있었다.

98년 1월 22일, 김원길은 5대그룹 기조실장들을 불렀다. 당선자인 DJ의 뜻에 따라 대기업 구조조정을 독려하기 위해서였다.

"빅딜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박세용 당시 현대그룹 종합기획실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반도체·철강·자동차 등이 과잉·중복투자입니다. 던질 것은 과감히 던지세요. 적어도 다음달 DJ의 대통령 취임 전까지는 가시적인 성과가 있어야 합니다."

당시 재벌은 환란의 주범으로 지목돼 개혁대상 1순위로 꼽히고 있었다.DJ는 당선 직후부터 재계 총수들과 연쇄회동을 갖고, "짐이 되는 기업은 버려라"며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DJ는 빅딜에 당이나 정부가 개입하는 데 부정적이었다.

'DJ노믹스'의 전도사로 불리며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내정됐던 김태동의 회고.

"정부가 개입해 은행더러 부실기업 부채를 깎아주라는 식의 빅딜은 시장원리에도 맞지 않는다. 대통령께 몇차례 빅딜을 해서는 안된다고 보고를 올렸다. 그래서 대통령도 빅딜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 DJ는 김원길에게도 빅딜 압박을 중단하라고 주문한다.

김원길의 회고.

"98년 1월 말이 되자 DJ가 '나는 빅딜을 들어본 적도, 얘기한 적도 없는데 왜 자꾸 얘기가 나오느냐'고 역정을 냈다. 그 뒤론 빅딜 얘기를 완전히 접었다."

공개적인 빅딜 논의는 이때부터 자취를 감춘다. 그러나 DJ는 물밑에서 이미 다른 경로로 빅딜을 추진하고 있었다.'철강왕'으로 불리며 재계와 친분도 두터운 공동정권의 대표 TJ가 적임자였다.TJ라면 재계를 소리없이 움직일 힘과 실력이 있었고, 정부 개입이란 시비도 벗을 수 있었다.

신국환 당시 TJ 경제특보(현 산업자원부 장관)의 회고.

"DJ가 당선 직후 TJ를 불러 빅딜안을 만들어 보라고 했다. TJ는 즉시 황경로 당시 포스코 경영연구소(POSRI)회장에게 연구를 맡겼다. 黃회장은 POSRI 박사들을 동원해 빅딜안을 만들었다. 삼각빅딜의 초첨은 1등 하는 기업에 몰아주자는 것이었다. 자동차는 현대, 반도체는 삼성, 유화는 LG식으로."

이렇게 해서 현대-삼성-LG를 묶는 삼각빅딜안은 98년 3월 초 완성됐다.TJ는 3월부터 완성된 삼각빅딜안을 들고 직접 재벌총수와 구조조정본부장들을 만난다.

이계안 당시 현대그룹 종합기획실 부사장(현 현대캐피탈 회장)의 증언.

"98년 3월 삼각빅딜을 TJ측에서 처음 통보해 왔다. TJ와 황경로 회장이 그룹간 중재역을 맡았다.5월이 되자 TJ는 세 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을 불러 '경제를 아는 내가 힘이 있을 때 (빅딜을)하는 게 좋다. 모르는 사람이 오면 더 힘들게 된다'며 빅딜을 독려하기도 했다."

TJ의 집요한 설득은 6월 9일 그때까지 가장 반대하던 LG가 빅딜안에 도장을 찍도록 한다. 그러자 이번엔 현대쪽이 반대했다. 빅딜이 현대그룹의 후계·상속구도를 헝클어 놓는다는 이유였다. TJ는 다시 현대그룹 설득에 나섰다.

6월 10일 김중권의 깜짝 발언은 바로 이런 민감한 시점에 터져나온 것이었다. 그러자 TJ는 물론 현대-삼성-LG 모두 삼각빅딜 자체를 아예 부인해 버린다. 이로써 삼각빅딜은 추진력을 잃게 됐다. TJ는 DJ에게 이제는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조언한다.

다시 신국환의 회고.

"DJ가 미국에서 돌아온 뒤 TJ는 '이제 빅딜은 정부가 나서서 하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건의했다. DJ가 이를 받아들여 내각에 빅딜안을 지시한 것으로 안다."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이나 해외여론은 한국이 기업개혁, 특히 재벌구조조정이 가장 미흡하다고 연일 지적하고 있었다. DJ는 삼각빅딜 무산을 못내 아쉬워했다. 재벌개혁의 가시적 성과를 대내외에 과시할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었다. DJ는 마침내 내각을 독려하고 나섰다.

"빅딜을 하려고 도장까지 찍어놓고서는 또다시 안하겠다고 여론을 호도하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 안된다. 적자가 나는 기업을 계속 끌고가 국민에게 부담을 줄 수 없다. 정부는 자기 권한을 국민에 대한 의무로서 기업에 사용해야 한다."(6월 16일, 국무회의)

"빅딜만 해도 나는 간절히 바랐다.IMF체제가 벌써 반년이 지났으니 국민 입장에서 볼 때 눈에 보이고 손에 쥐는 게 있어야 한다"(6월 17일, 경제6단체장 오찬회의)

DJ의 빅딜 드라이브는 그간 빅딜을 반대해 온 경제관료들의 목소리를 일거에 잠재운다.

이규성 당시 재정경제부 장관의 회고.

"당시 경제관료 중 내각에 있는 누구도 정부가 빅딜에 나서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통령의 뜻이 워낙 완강했다."

결국 금융감독위원회가 재계 압박에 앞장을 서고 재경부·공정거래위원회가 집중 지원사격에 나선다.

"5대그룹이 사업교환 등 보다 적극적인 구조조정을 하지 않을 경우 신규대출을 중단하는 등 금융기관이 적극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이헌재 금감위원장, 6월18일 기업퇴출 발표문)

"대기업은 빅딜을 통해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이규성 재경부장관,7월 9일 고려대 강연)

공정위는 6월 22일 5대그룹에 대해 2차 내부거래 조사에 착수한다. 그즈음 사정당국에선 "외화유출 재벌총수 3~5명 구속 검토" 방침을 연일 흘렸다.

마침내 7월 4일, DJ와 전경련 회장단은 청와대에서 오찬회동을 갖고 '재계는 스스로의 생존을 위한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한다. 대기업간 사업교환은 자율적으로 추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합의한다.

빅딜이 정부·재계간 공식 테이블에 정식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빅딜에 직접 나서면서 '은행을 통해 재벌을 개혁한다'는 DJ정부의 재벌개혁 프로그램도 혼선을 빚는다.

이헌재 당시 금감위원장의 회고.

"빅딜이 강조되면서 기준을 정해놓고 은행을 통해 재벌을 개혁한다는 기본원칙이 무너졌다. 재계는 빅딜을 핑계로 정부와 직접 딜을 하면서 은행을 통한 구조조정을 빠져나간 것이다."

그러나 정부쪽에서 빅딜의 총대를 멨던 강봉균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은 다른 논리를 편다.

강봉균의 회고.

"당시 빅딜은 중복투자와 과잉설비 해소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 문제는 빅딜 외에 달리 적절한 방법이 없었다. 밀실 야합에 의해 기업의 생사를 결정한 과거 정권의 부실기업 정리와도 완전히 달랐다. 공개·투명한 장으로 끌어냈다. 구체적인 업종도 재계가 정하고, 어떻게 자르고 나누고 합칠지도 기업간 자율 협의토록 했다. 그렇다고 재계에만 맡겨놓으면 시간이 너무 걸려 정부가 강력한 중재자로 나선 것이다."

강봉균은 7월 4일 청와대 합의 직후 박태영 당시 산업자원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빅딜안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한다.

산자부는 한달간 자동차·조선·철강·석유화학·발전설비·철도차량·항공기·LCD·반도체·시멘트 등 10개 업종을 과잉설비 업종으로 분류한 구조조정안을 만들어 8월 초 전경련에 전달했다. 9월 3일 전경련은 산자부안을 토대로 7개 업종 빅딜안을 발표한다. 산자부안 중 반도체·자동차·석유화학·발전설비·철도차량·항공기 6개 업종만 수용하고 나머지 4개 업종은 빼되 정유를 재계 스스로 추가한 것이었다.

손병두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의 회고.

"당시 박태영 산업자원부 장관은 10개 중 '딴 것은 몰라도 자동차·반도체·석유화학은 꼭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TJ가 추진했던 삼각빅딜업종이었다. 그래서 내가 3개는 필수과목, 나머지는 선택과목이라고 했다."

밑그림은 그렸지만 실천까지는 멀고 험한 여정이 남아 있었다. 예컨대 반도체의 경우 현대전자와 LG반도체를 통합한다지만 누가, 언제까지 인수하느냐는 등의 결정은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기업을 주고받는 재벌간, 또는 정부와 기업간 복잡한 득실 계산이 필요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