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경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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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가난하고 못 배운 것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그 가난의 역경을 딛고 훌륭한 인물로 자란 사람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고, 그 인간승리에 박수를 보낸다. 반면 좋은 환경에서 좋은 학교를 나와 훌륭하게 된 사람 역시 우리는 존경한다. 가난하고 부유하고, 좋은 학교를 나오고 안나오고가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주어진 환경에서 어떻게 성장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가난했기 때문에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도 있고, 가난의 상처로 왜곡된 마음 때문에 바른 지도자가 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부유함 역시 마찬가지로 상반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매우 부유한 가정에서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고 자랐다. 케네디는 그의 할아버지가 이미 보스턴에서 성공한 기업인이었고, 그의 아버지 역시 기업인으로서 영국대사를 지냈다.

가난·공부 못한게 미덕?

루스벨트는 뉴욕시 근교 하이드 파크의 1백88에이커 대장원에서 특별 가정교사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둘 다 최고 명문 하버드 대학을 나왔다. 이와 대조적인 사람이 닉슨이었다. 그는 가난했지만 똑똑했다. 그 역시 하버드 대학에서 입학허가를 받았다. 장학금을 줄 테니 기숙사비만 내라는데도 그 돈을 낼 수 없어 집 근처 지방대학에 진학했다. 부유한 가정 출신인 루스벨트는 1930년대 미국의 경제 대공황시절 가난으로부터의 자유를 외치며 가장 진보적인 경제정책을 도입했다. 케네디 역시 가장 천대받던 흑인을 위해 인권법을 제정했고 현재 미국의 각종 사회보장 제도의 초석을 마련했다. 반면 닉슨은 개천에서 난 용이 됐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부자와 좋은 학벌을 가진 자에 대한 증오가 남아 있었다. 그는 단 한명의 아이비 리그 출신 참모도 두지 않았다. 그의 이같은 미움이 뿌리가 돼 결국 워터게이트 사건을 만들고 그는 중도에서 물러났다. 반면 찢어지게 가난해 정규 교육조차 받지 못했던 링컨은 최고로 훌륭한 대통령으로 기록되고 있다. 따라서 가난했느냐, 부유했느냐가 대통령 자격의 잣대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요즘 우리 대통령 후보들은 가난하고 공부 못한 것이 무슨 큰 미덕이나 되는 것처럼 행동한다. 실제 가난했던 사람이야 그렇다 치고, 별로 그렇지 않았던 사람도 옛날에 가난했음을 내세우고 심지어 공부를 못했다며 3백등 하던 성적표까지 공개한다. 깔끔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바지도 다려 입지 않는단다. 우리는 누구나 많이 배우고 잘살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는 것이 정상적인 사회다. 그런데 대통령 후보들은 가난하고 공부 못한 것을 자랑하니 이 무슨 역설인가.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가. 우리 국민이 유난히 가난한 후보에게 더 점수를 주어서는 아닐까. 잘사는 사람보다 못사는 사람, 잘난 사람보다는 보통사람, 귀족풍보다는 서민풍에 막연한 편애를 가진 것은 아닐까.

가난했던 사람이 리더가 된다 하여 가난한 사람이 모두 잘살게 되는 것이 아니고, 부자가 리더가 된다 하여 부자만 더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單線的 후보 판단은 위험

과거의 빈부가 문제가 아니라 누구의 정책이 더 현실적이며 올바른가가 문제다. 파이를 더 키울 것인가, 아니면 있는 파이를 지금 나누어 먹을 것인가에 대한 판단의 문제 등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후보가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느냐도 중요한 잣대다. 가난했기 때문에 증오에 차 있고, 부유하고 많이 배웠기 때문에 오만에 젖어 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된다면 나라는 불행해진다. 국민이 이런 것을 구별해내야 제대로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

우리의 선거판은 극히 단선(單線)적이며 천박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가난은 정의이고 부유한 과거는 악이 된다. 그런 민심을 따라 후보들은 열심히 가난경쟁을 하고 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후보들은 좌우를 불문하고 모두 포퓰리스트의 길을 걷게 되고 국민은 편견의 포로가 돼 흑백에만 매달리게 된다. 우리의 정치는 선거를 할수록 점점 더 저질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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