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어떻게 허물어져가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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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초록물고기 (SBS 밤 11시40분)

'녹천에는 똥이 많다' 등의 소설을 쓰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데뷔한 이창동 감독의 1997년작이다.

개발 논리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그늘을 조금의 과장이나 미화 없이 담백하게 응시한 이 작품은 개봉 당시 '90년대 한국 영화 최대의 수확'이라는 찬사를 받았다.'박하사탕'과 현재 제작 중인 '오아시스'까지 여일한 이감독의 리얼리즘적 시선은 가벼운 트렌디물 일색인 최근 한국 영화계의 푸른 신호다.

한석규가 조직의 보스를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난 뒤 큰 형에게 전화를 걸어 "형, 기억나? 어렸을 때 빨간색 철교 밑에서 초록색 물고기 잡는다고 하다 슬리퍼를 빠뜨리는 바람에 하루종일 놀지도 못하고 찾으러 다녔잖아"라며 울먹이는 장면은 한국 영화 명장면 중 하나로 꼽아도 될 법하다. 초록물고기는 이루지 못한 꿈이며 그렇기에 더욱 소중한 희망이다.

제대하고 고향 일산에 돌아온 막둥이(한석규)는 예전에 있던 논과 밭이 사라진 대신 빽빽이 들어찬 고층 아파트숲 앞에 서게 된다. 가족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조직폭력배의 일원이 된 막둥이는 배태곤(문성근)을 두목으로 받들면서 충성을 다한다. 그런데 배태곤의 옛날 보스인 김양길(명계남)이 나타나면서 배태곤 조직은 와해된다. 순진하던 막둥이는 조직을 살리기 위해 그 착한 손에 피를 묻히게 된다.

영화는 고향으로 가는 기차에 오른 막둥이가 미애(심혜진)의 장밋빛 스카프를 줍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녀의 스카프는 아름답지만 비극으로 끝나는 두 사람의 슬픈 운명을 상징하는 것만 같다. 이감독의 진지한 열정을 화려한 색깔로 보좌해주는 건 '정말 나쁜 놈'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야비한 모습을 보여주는 문성근 등 출연진의 열연이다. ★★★★☆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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