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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흔들리는 늙은 富國> 위기 속에서 위기 못 느낀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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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도쿄는 여전히 반듯하게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이른바 '잃어버린 10년'과 올초부터 무성했던 '3월 위기설'이 어느 나라 이야기냐는 듯했다.

서울의 지하철 2호선 격인 야마노테(山手) 순환선은 역마다 수많은 사람들을 빨아들이고 토해냈다. 휴일이면 차 없는 거리가 되는 긴자(銀座)와 아키하바라(秋葉原·도쿄 최대의 전자상가)는 인파로 붐볐다. 록본기(本木)·시부야(澁谷)·아카사카(赤坂) 등 유흥가는 밤 늦게까지 손님의 발길이 이어졌다.

서울 명동으로 볼 수 있는 신주쿠(新宿)를 오가는 젊은 여성들은 세명 중 두명 꼴로 루이뷔통 핸드백을 걸쳤다.

"10년 동안 경기가 좋지 않았어도 월급은 조금씩 오르거나 같았다."(미쓰비시중공업 우치다 스스무 부장·53)

"마루이그룹에서 34년째 일한다. 회사가 망하지 않는 한 당연히 60세 정년까지 간다."(신용대출회사 제로 퍼스트 오쓰카 지점장·57)

"물건 값이 싸졌다. 생활이 어렵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회사원 가미카타 메구미코·24)

주기적으로 위기설이 나돌지만 일본의 보통 사람들은 위기감이 거의 없다. 정부가 신용등급 하락을 감수하면서까지 재정과 금융으로 문제를 덮어온 데다, 큰 기업들이 여전히 굴러가고 종신고용을 보장하며 월급을 깎지 않았고, 집에 저축한 돈이 넉넉한 데다 의식주 가격이 죄다 싸졌기 때문이다.

정부는 관행처럼 국채를 발행해 나라 살림을 짜고 사업을 벌였다. 그 결과 재정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현재 공식적인 국가부채만 6백70조엔으로 지난해 세입(47조엔)의 14배다. 적어도 미래 10여년의 자산을 미리 끌어다 과거 10년의 구멍을 메운 셈이다.

나카지마 아쓰시 미즈호 종합연구소 조사부장은 "은행이 부실을 싸안고 정부는 적자재정으로 보조금을 주면서 도산과 구조조정의 아픔을 모르게 인위적인 장벽을 쌓았으므로 국민들이 위기를 느낄 수 없다"고 말한다.

막대한 재정적자와 금융 부실, 말뿐인 개혁 등 나라 밖에서 위기로 보는 것 때문에 역설적으로 대중은 위기를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디플레이션이 진행되면서 물가가 떨어지자 사람들의 실질소득이 늘어난 셈이다. 1천3백엔은 주어야 먹던 점심을 이제는 5백엔이면 해결할 수 있다. 1990년대 초 2백10엔 하던 햄버거 값도 80엔으로 떨어졌다. 하나에 1백엔씩에 파는 '백(百)엔점(店)에 가면 동남아산(産)이긴 해도 어지간한 물건이 다 있다.

'미스터 엔'으로 불린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전 대장성 심의관(현 게이오대 교수)은 "그 어렵다는 90년대에도 임금 비중이 커져 디플레까지 감안하면 실질소득이 20% 정도는 늘어난 셈"이라며 "그래서 일반 국민들이 위기감을 못느끼고 도리어 만족하는 상태가 되었다"고 진단했다.

대다수 일본 기업들은 어렵다면서도 금과옥조처럼 종신고용 제도를 끌고 간다. '무라 샤카이(村社會)'라는 말처럼 직장과 업종·생각이 같은 사람들이 이룬 집단에 일단 들어가면 끝까지 보듬고 간다.

벌이가 시원찮은 기업에서 상여금과 잔업수당은 줄여도 본봉이나 집세 보조·교통비 부담 등 복리후생비는 거의 그대로다. 통폐합 대상인 야스다생명의 한 직원(30)은 월세 12만5천엔 가운데 10만엔과 요코하마에서 도쿄를 오가는 교통비 전부를 회사로부터 보조받는다.

안팎에서 걱정하던 3월 위기설은 큰 탈 없이 넘어갔다. 하지만 벌써 '6월 위기설'이 나돈다. 6월께 국제통화기금(IMF)이 일본 경제를 점검하기 위해 들이닥치고, 비슷한 시기에 무디스 등 국제 신용평가기관이 국가신용등급을 또 낮추리란 전망 때문이다.

정부 통계로 35조7천억엔, 야당과 IMF가 1백50조엔으로 보는 부실채권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이다. 이 때문에 금융 시스템이 무너질 것이라는 위기설이 거의 매년 결산기(3,9월)마다 되풀이돼 왔다.

정치권 일각에선 오는 7~8월께 국회가 해산되고 총선거가 있을 것으로 본다. 개혁에 대한 기대를 안고 80%대의 높은 지지율로 고이즈미 총리가 취임한 지 1년. 하지만 개혁은 헛돌고 지지도가 40%대로 추락했기 때문이다. 대중적 지지를 받는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는 신당 창당을 선언한 상태다.

서점에 가면 분위기는 더 험악하다.'대실업(大失業)' '상실의 시대' '자멸(自滅)' '실패''불량채권' '인구 반감(半減)'등 살벌한 문구와, 그래도 길을 찾아보자는 '재생(再生)' '재건(再建)'과 같은 말이 제목에 들어간 책들이 즐비하다.

그간 이런 책들을 사보면서도 위기설에 무감각했던 사람들이 올 초부터는 서서히 다가오는 불황의 그림자를 느끼기 시작했다.

생산활동으로 생긴 소득에서 노동자가 임금으로 가져가는 노동소득 분배율이 제조업의 경우 80% 가까이로 높아졌다. 한국보다 30%포인트 가량이나 높다.

<그래프 참조>

그렇지 않아도 실적이 시원찮은 기업들은 돌아오는 몫이 10% 수준밖에 안돼 이제 숨이 턱에 찼다. 현재의 임금 수준을 더 끌고 갔다가는 회사를 지탱하기 어려워진다. 이제는 직원 수를 줄이든지 급여를 낮추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미쓰비시중공업 이치가와 와타루 광고그룹장은 "올들어 기본급이 처음으로 약간 줄었다"면서 "정말로 경기가 안좋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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