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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기하라가 통곡한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스기하라 지우네(杉原千畝)는 나치 독일군이 동유럽을 석권하던 1940년 당시 리투아니아 주재 일본 대표부의 부영사였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폴란드를 탈출한 수만명의 유대인들이 리투아니아로 쏟아져 들어올 때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그곳도 안전지대는 아니었다. 리투아니아가 나치 독일군에 점령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스기하라는 그해 7월에서 8월까지 한달 동안 그렇게 하지 말라는 본국 정부의 훈령을 무시하고 1만명의 유대인들에게 일본 통과 비자를 발급했다. 그 때 일본은 나치 독일과 추축(樞軸)관계에 있었다. 일본 외무성은 서둘러 그에게 루마니아 근무 발령을 냈다.

그가 떠나던 날 유대인들은 역에까지 그를 쫓아왔다. 그는 베를린행 기차에 몸을 싣고도 비자서류에 서명을 하여 차창 밖으로 던져줬다. 스기하라에게서 비자를 받은 유대인들 중 5천명이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배를 타고 일본에 상륙한 뒤 미국·캐나다·호주 같은 나라로 망명할 수 있었다.

나치 피해온 유대인 보호

그러나 루마니아에서 소련군에게 붙들려 수용소 생활까지 하고 47년 귀국한 인도주의자 스기하라를 기다리는 것은 외무성의 냉대와 강요된 사직이었다. 그의 이야기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사람들이 그를 일본의 쉰들러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70년대에 들어서다. 이스라엘은 그에게 오스카 쉰들러에게 수여한 것과 같은 '인류를 위한 불멸의 채플린상'을 주고 리투아니아에는 그의 동상이 섰다.

다른 장면을 보자. 중국 선양(瀋陽)의 일본 총영사관에 뛰어든 북한여인을 중국 경찰들이 끌어낸다. 여인은 울부짖으며 총영사관 철문에 매달려 발버둥친다. 두세살쯤으로 보이는 여인의 어린 딸이 영문을 모른 채 멀뚱하게 바라본다. 그 실랑이를 지켜보기만 하던 일본 영사는 중국 경찰들이 마침내 여인을 총영사관 철문 밖으로 끌어내자 친절하게도 땅에 떨어진 경찰의 모자를 집어준다.

리투아니아에서 극한상황에 처한 5천명의 유대인들에게 활로를 열어준 스기하라 부영사와 절망적으로 울부짖는 여인과 어린 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를 거부한 선양 일본 총영사관 영사는 어디가 다른가.

스기하라는 전시하(戰時下)군국주의 일본의 외교관이면서도 죄없이 죽음을 맞을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본국 정부의 훈령을 무시하는 도덕적 용기를 발휘했다. 그는 쉰들러와도 달랐다. 쉰들러는 어린 시절 유대인들과 어울려 살았다. 그래서 유대인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 그리고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본대로 유대인을 돕는 사업상의 동기도 있었다.

그러나 스기하라에게는 유대인들을 사지(死地)에서 구해내야 하는 개인적인 동기 같은 것은 없었다. 그는 그들이 꼭 유대인이라서가 아니라 악마에게 쫓기는 인간들이었기 때문에 인간의 도리로 그들을 도왔다. 그가 선양의 일본 영사였다면 사정은 달랐을 것이다.

스기하라가 예외적인 일본인, 돌연변이(突然變異)의 일본인이었다면 선양의 일본 영사는 전형적인 일본인, 일본 정부의 망명 신청자에 대한 편협한 정책과 일본 사회 전체의 인권불감증을 충실히 대표하는 일본인이라고 하겠다.

탈북자 인권 외면해서야

일본은 75년 베트남 패망 후 10년 동안 공산화된 베트남을 탈출해 태평양을 표류하는 보트피플들을 받아들이는 데 아시아국가들 중에서, 그리고 잘 사는 나라들 중에서 가장 인색했다. 망명 희망자를 포함해 신원이 확실하지 않은 사람들을 일본 영사관에 들여놓지 않는다는 일본 정부의 방침이라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일본 정부는 중국 경찰이 북한 사람들을 끌어내는 데 총영사관 직원들이 협조하지 않았다는 공식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일본의 여론과 언론들도 그런 주장을 믿지 않는다. 스기하라를 영웅 대접하기는커녕 사임을 강요한 일본 아닌가.

스기하라의 의거에서 반세기의 시간이 흘렀지만 보편적인 인권을 위해서 글로벌 수준의 희생을 감수하기를 거부하는 일본은 변한 게 없다. 그런 일본의 모습이 선양사건으로 적나라하게 폭로됐다. 난민·무국적자·망명자에 대한 자세를 바꾸지 않으면 일본은 문화적·도덕적 후진국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일본인들이여, 스기하라의 통곡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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